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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 속에 부활한 건축

전쟁의 상흔 속에 부활한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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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태진 사진. 출처 별도 표기 자료. A24

 

영화 ‘브루탈리스트 The Brutalist’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 역)가 새로운 삶을 찾아 이주한 미국에서 여러 고난을 겪어내며 정착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전쟁 전 유럽에서 명성을 쌓았던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건축을 공부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며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전쟁 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지만, 재능을 펼쳐 보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일용 노동자로 전락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The Brutalist’의 포스터 <이미지 제공 = A24>

 

그의 재능은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 리 밴 뷰런(가이 피어스 역)에 의해 발견된다. 둘의 인연은 토스가 밴 뷰런의 아들, 해리의 요청으로 그의 서재를 리모델링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완공 후 밴 뷰런은 토스의 건축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내쫓고 작업비조차 지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3년 뒤 서재가 유명 건축 잡지 ‘Look’에 실리자 밴 뷰런의 태도는 급변한다. 변덕스러운 밴 뷰런 덕분에 토스는 펜실베이니아의 언덕 위에 세워질 공공센터의 설계를 맡게 되었고, 그는 전쟁 전 유럽에서 작업했던 건축을 다시 구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토스는 도서관, 극장, 체육관, 예배당 등을 포함한 ‘마가렛 밴 뷰런 센터’를 설계한다. 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설계 계획은 지역 사회 및 후원자, 건축주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겪는다. 예컨대 토스는 건물 전체를 콘크리트로 설계하고자 하지만 시공사는 콘크리트의 가능성을 무시하며 대리석을 주장하며 갈등을 겪거나, 내부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투입된 새로운 건축가가 토스의 설계를 멋대로 바꾸려 들거나,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를 덮기 위해 건축주가 돌연 공사를 중단시키는 등 끊임없는 위기를 맞닥뜨린다. 게다가 공사가 진행될수록 건축주 밴 뷰런과 토스의 권력 불균형이 벌어지고, 결국 토스의 삶과 경력까지 균열을 내며 그는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완성을 향한 토스의 집념은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끝까지 이어가며 프로젝트를 완성하고야 만다.

 

라즐로 토스가 설계한 밴 뷰런의 서재. 밴 뷰런은 공간으로 쏟아지는 자연 채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미지 제공 = A24>
마가렛 밴 뷰런 센터 건축 현장. 수위기 속에서도 라즐로 토스는 끝까지 자신의 건축 철학을 지켜내며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이미지 제공 = A24>

아트 디렉터에게 영감을 준 건축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건축적 공간은 토스가 설계한 서재와 마가렛 밴 뷰런 센터이다. 서재는 토스가 그동안 축적해 온 미적 감각과 건축적 실험이 집약된 공간이며, 마가렛 밴 뷰런 센터는 그의 가장 큰 야망과 현실의 벽과 교차하는 장소로 그려진다. 이러한 공간들은 주인공의 내면과 이상을 반영하며 그의 세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단순히 라즐로 토스의 생애를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건축 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실존하는 여러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된 공간들을 주요 배경으로 활용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주디 베커Judy Becker는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동시대 건축가들의 작품을 참고했다고 밝히며, 이를 통해 영화 속 건축적 요소를 더욱 정교하게 구현해냈다.

 

3년 후, 밴 뷰런은 라즐로 토스를 다시 찾아온다. 그는 과거의 태도를 반성하며 서재 작업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자 한다. 당시에는 그의 건축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토스의 작품이 지닌 독창성과 깊이를 깨닫게 된 것이다. 밴 뷰런은 사과의 뜻을 전하며, 늦었지만 정당한 보상을 건네려 한다. <이미지 제공 = A24>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는 헝가리 출신의 모더니즘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로 20세기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감독 브래디 코벳Brady Corbet은 주인공 라즐로 토스가 브로이어에게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관람객이 바라보기에 두 인물 간의 유사점은 다소 제한적이다. 브로이어와 토스는 모두 유대인으로 태어나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영화 속 토스는 무료 급식소를 이용할 정도로 궁핍한 삶을 살아간다. 반면에 실제 브로이어는 비교적 안정된 경제적 여건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브로이어의 건축은 거대한 콘크리트 슬래브를 특징으로 하며 그의 대표작들은 강렬한 조형성과 기능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로 ‘파리 유네스코 본부(1956)’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독특한 입구, ‘미네소타주 콜리지빌의 세인트 존스 수도원(1954)’의 종탑, 그리고 ‘뉴욕대학교 브롱크스 캠퍼스’ 등이 있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 ©Peter Miller
세인트 존스 수도원 ©Bobak Ha’Eri

 

안도 타다오Tadao Ando 역시 영화 속 건축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가렛 밴 뷰런 센터의 가장 중요한 건축적 요소 중 하나는 태양이 정남 쪽에 위치할 때, 천장의 십자가 모양 개구부를 통해 내부로 들어오는 빛이 만들어내는 상징적인 십자가이다. 이 장면은 그의 대표작 ‘빛의 교회 (Church of the Light)’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안도 타다오는 노출 콘크리트를 활용한 절제된 공간과 자연광을 활용해 건축적 경험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빛의 교회에서는 정면 벽에 십자가 형태로 뚫린 개구부를 통해 자연광이 내부로 유입되며, 성스러움과 명상적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이는 마가렛 밴 뷰런 센터의 빛과 그림자가 연출하는 공간적 드라마와 맥락을 같이한다.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 ©Purple Cloud

 

마가렛 밴 뷰런 센터는 루이스 칸 Louis Kahn의 ‘솔크 연구소(Salk Institute)’와도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솔크 연구소는 엄격한 대칭성을 바탕으로 한 건축적 질서와 콘크리트의 물성 강조, 기능성과 상징성을 결합한 디자인을 통해 건축적 위엄과 철학적 깊이를 담아낸다. 연구소 중앙의 열린 광장은 단순한 보행 공간이 아니라 명상과 사색의 공간으로 설계되었으며, 이는 연구소가 단순한 실험실을 넘어 학문적 탐구와 인간적 교감을 위한 장소가 되기를 바랐던 칸의 철학을 반영한다. 마가렛 밴 뷰런 센터 역시 연구 시설이지만 동시에 건축가 토스의 철학과 예술적 신념이 구현된 공간으로 기능하며 그가 처한 갈등과 투쟁의 무대가 된다.

영화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존슨 왁스 빌딩Johnson Wax Headquarters’의 유기적 형태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라이트의 존슨 왁스 빌딩은 곡선형 기둥과 개방적인 내부 공간을 통해 독창적인 건축미를 보여주며, 이는 영화 속 마가렛 밴 뷰런 센터의 공간 구성이 기존의 고전적 건축 요소와 현대적 기능성을 결합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영화 속에서 건축은 마르셀 브로이어, 안도 타다오, 루이스 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 여러 건축가의 영향을 받으며, 모더니즘과 브루탈리즘이 교차하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기능성과 상징성을 영화적으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루이스 칸Louis Kahn의 대표작 ‘솔크 연구소(Salk Institute)’ ©Elizabeth Daniels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의 ‘존슨 왁스 빌딩(Johnson Wax Headquarters)’ ©Ezra Stoller

 

남아 있는 것, 건축 그리고 예술

‘브루탈리스트’는 ‘제 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은사자상(감독상)’과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할 정도로 높은 영화적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건축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한 예술가의 고뇌와 집념을 깊이 있게 담아낸 이 작품은 반드시 챙겨봐야 할 명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영화가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를 모티브로 삼았음에도 라즐로 토스의 행적과는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건축계의 비판이 있다지만 그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토스를 한 예술가로 바라본다면 그의 집념과 신념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정육면체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직접 만들어 보여주는 것”, “건축이란 폭우와 홍수로 다뉴브강이 범람해 도시 전체가 잠기더라도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토스의 태도는 단순한 건축가를 넘어 시대를 견뎌내는 예술가임을 보여준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단순한 건축 영화가 아니라, 예술과 신념, 그리고 시대적 도전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한 인물의 이야기로 기억될 것이다.

<이미지 제공 = A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