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희동의 겨울이 밝아지는 방식
글 & 사진. 김태진 자료. 연희동 상인회 ‘우연희’
연희동이 스스로 밝힌 겨울
서울 연희동 상권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골목마다 구상나무 트리가 세워진다. 3m 남짓한 구상나무 화분을 가게 앞에 두고 사장님과 인근 조경 스튜디오, 꽃집이 함께 손을 보태 트리를 꾸민다. ‘연희 크리스마스 타운’은 서대문구청의 주도로 만들어진 조성된 거리가 아니다. 작년부터 동네의 소상공인들이 스스로 만들어 온 겨울의 풍경이다.

시작은 단순했다. 연희동의 조경 스튜디오 ‘니나플라워’를 운영하는 안선애 대표는 겨울이 되면 유독 빨리 어두워지는 골목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주거지역과 상권이 맞닿은 연희동에서는 빛 공해가 우려되어 저녁까지 화려한 조명을 기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골목이 조금만 더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동네에 크리스마스 풍경을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마음으로 상점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해 겨울, 그렇게 모인 가게가 36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활용해 구상나무를 원가로 제공했고, 첫 해의 크리스마스 타운은 순수한 자발성과 사비로 완성했다. 작은 시도였지만 그 빛은 올해까지 이어졌다.
올해는 그 연결이 한 단계 더 단단해졌다. 참여 상점은 60곳으로 늘었고, 상인들은 임의단체를 꾸려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연희동 상권은 흩어진 골목상권을 잇는 ‘골목형상점가’로 등록됐고, ‘강한소상공인 성장지원사업’을 통해 크리스마스 타운을 이어갈 최소한의 구조를 갖추게 됐다. 이 프로젝트에서 행정은 출발점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던 골목의 흐름을 제도 안으로 옮겨온 결과에 가까웠다.
연희동에서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 안선애 대표(니나의 정원)와 김예본 대표(아트워크룸)를 만나보았다.

연희동이라는 조건에서 피어난 풍경
연희동의 밤이 쉽게 밝아질 수 없었던 데에는 도시 구조와 제도적 조건이 함께 작용한다. 연희동 일대는 1종 일반주거지역*을 중심으로 근린생활시설이 점처럼 섞여 있는 동네다. 상업지역처럼 늦은 시간까지 조명과 음악을 허용하는 구조가 아니라서 골목 단위로 주류 판매가 어렵거나 영업 시간에도 제약이 따른다. 대형 간판이나 강한 조명은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주거의 안정을 우선하는 규제는 이 동네를 조용하게 만들었으나 활기찬 동시에 밤 풍경을 만들기에는 어려운 조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연희동의 크리스마스 타운은 ‘무언가를 더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허용된 범위 안에서 밤의 온도를 조금 바꾸는 선택이었다. 규제를 풀기 위한 움직임을 만들기보다 가능한 방식으로 풍경을 만들었다. 나무 한 그루와 낮은 조명은 주거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골목의 표정을 바꿀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안 대표가 생각한 ‘조금 더 밝은 밤’은 연희동이라는 동네의 조건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에서 출발했다.
*연희동은 제1종 전용주거지역과 제1종 일반주거지역이 혼재되어 있다. 이는 단독주택 중심으로 주거환경의 보호를 위한 용도지역으로, 비교적 낮은 층 수와 밀도를 유지하며 필로티 포함 6층 이하, 용적률 200%까지 건축이 허용되는 지역이 많아 저층 주택가가 주를 이룬다.



함께 만드는 풍경
크리스마스 타운의 준비가 시작되면 연희동의 꽃집 다섯 곳은 자연스럽게 한 팀이 된다. 세 명이 한 팀이 되어 사다리를 나르고 전선을 정리하며, 골목마다 놓인 구상나무의 상태를 살피고 장식의 균형을 맞춘다. 한 가게 앞의 트리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세 사람이 필요하다. 거점 트리의 자리를 내어준 가게 사장님과 트리를 디자인한 꽃집 사장님, 그리고 상인회가 손을 보탠다.
올해는 참여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특정 가게가 거리나 위치 때문에 소외되지 않도록 구획을 나눴다. 연희로11길 일대에 거점 트리를 열 곳 설정했다. 이 구간 안에 있는 가게들은 모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작년에는 참여 여부를 두고 망설이는 가게도 있었다고 한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생업에 쫓기는 상인들에게 선뜻 나서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업하느라 여유가 없다’거나 ‘애써 준비했는데 사람이 오지 않으면 더 힘들 것 같다’는 반응도 있었다고 한다. 신뢰할 만한 공공기관이나 단체가 주도하는 행사도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인들은 각자 매장을 지켜야 하니, 트리를 만들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작년엔 연희동이 유난히 조용했어요. 봄인데도 사람이 없었으니 겨울엔 더 막막했죠.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사람을 오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래서 구상나무 트리가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연희동은 궁동산의 자연이 연결되는 동네잖아요.
— 니나의 정원, 안선애 대표

제도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들
안 대표와 김 대표는 연희 크리스마스 타운을 1회성 행사로 만들 생각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 풍경이 10년, 20년 이어져 연희동의 문화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호의나 열정에 기대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프로젝트를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체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올해 상인들은 논의 끝에 임의단체를 만들고 회장을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연희동 토박이이기도 한 김규진 구의원이 행정적 조율을 맡았다. 상인들에게 행정 절차를 안내하며 막히는 지점을 함께 풀어가는 역할이었다. 그 결과 연희동 상권은 골목형 상점가로 등록됐고, ‘강한소상공인 성장지원사업’과 연계해 올해 거리 조경 비용 일부를 확보했다. 다만 운영은 여전히 상인회 임원 셋이 시간을 쪼개 맡는다.
이 프로젝트가 매력적인 지점은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행정에 제안해 예산을 확보하는 방식도 가능했지만, 안 대표와 김 대표는 ‘엉성하더라도 우리끼리 먼저 해보자’는 결론을 택했다. 행정의 결정과 예산을 앞세운 기획이 아닌 이미 작동하고 있던 골목의 흐름이 제도 안으로 진입한 셈이다.



골목이 남긴 불빛
올해는 뜨개 테마 거리도 더해졌다. 연희동 뜨개 상점 ‘바늘이야기’의 뜨개 오너먼트 기부 캠페인을 통해 모인 장식물들이 골목 곳곳에 걸렸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누군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작은 오너먼트가 도시의 풍경이 되는 순간이었다. 공공 공간을 꾸미는 권한이 상인과 주민에게 자연스럽게 확장됐다.
작년 크리스마스가 끝난 뒤 상인들을 모아 작은 파티를 열었어요. 그 자리는 축하라기보다 정리와 공유의 시간에 가까웠는데, 함께 참여하지 못했던 가게들이 “내년에는 우리도 하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말했어요. “올해는 우리 돈으로 했지만, 내년에는 지원금을 받아볼게요!”라고 했는데 그게 이뤄졌어요.
— 니나의 정원, 안선애 대표
연희동의 크리스마스 타운은 누군가가 설계한 장면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조금씩 보탠 풍경이다. 주민만큼 오래 동네에 머무는 상인이 거리의 주인이 되어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흔적이다. 연희(延禧). 기쁨이 이어지는 동네라는 이름처럼, 연희동의 겨울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