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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필요한 모두를 위한 도시

집이 필요한 모두를 위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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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정민 에디터. 김태진

 

[누구와 함께 이 도시에 살 것인가] 우리는 보통 도시를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화된 발명품이라 생각하며 자연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도시계획가와 설계자들이 머릿속에 그린 청사진대로 질서정연하게 세워진 문명의 산물처럼 말이죠. 그러나 도시는 단순한 건물과 도로의 집합이 아닙니다. 도시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안에서 수많은 존재가 서로 얽히고 섞이면서 공존합니다. 도시 공간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수많은 존재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도시’는 누구의 것일까요?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도시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the city)’를 바탕으로 도시라는 공간을 새롭게 들여다봅니다. 비인간 동물부터 새들, 쓰레기까지, 도시에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 주변의 수많은 공존 방식을 탐색합니다.

이 시리즈는 하나의 질문이자 선언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이 도시에 살 것인가.

 

글 싣는 순서.
①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도시 – 집 밖의 동물들
② 새들과 함께 사는 도시 – 탐조와 스티커
③ 쓰레기와 함께 사는 도시 – 깨끗함과 더러움의 등가교환
④ 다양한 몸이 춤추는 도시 – 도래하지 않은 몸
⑤ 무지개가 지지 않는 도시 – 일상과 축제, 거리와 광장

⑥ 집이 필요한 모두를 위한 도시 – 너무 많은 집


 

몇 년 전 등장한 ‘전세 사기’라는 단어가 이제는 낯설지 않다. 동시에 집 값은 언제나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있다. 어딜 가나 아파트를 짓고 있는 현장은 이어진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사람들의 터전이 아파트로만 변해간다. 재개발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모든 주거가 아파트로 획일화되는 듯한 기분이다. 아파트 외의 다른 상상은 할 수 없는 걸까. 결국에 드는 생각은 이것이다.

 

집이 너무 많다.

 

이 문장은 모순처럼 들린다. 전세 사기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있고 청년들이 자취방을 전전하며 주거 불안 속에서 살고 있으며, 거리의 노숙인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집이 너무 많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이 정확히 한국 도시의 역설이다. 서울에는 아파트가 수백 만 채 있다. 부동산은 국민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고, 아파트 한 채를 사고파는 것이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누군가는 1주택, 누군가는 2주택, 누군가는 3주택을 소유한다. 그러나 그 주위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있다. 집은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 집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세 사기는 개인이 저지르는 불법 행위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적으로 ‘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집은 더 이상 거주의 공간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이 되었다. 전세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그 돈으로 다른 집을 사고, 그 집을 또 전세로 주는 구조. 이 피라미드가 무너질 때 가장 밑에 있던 사람들이 집을 잃는다.

 

‘고시원’ ©박상희 <출처: 토포하우스>

 

집이 너무 많은데, 왜 모든 사람이 집을 가질 수 없을까.

 

집이 많다는 것은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많다’라는 뜻이 아니라 ‘투자 대상이 될 수 있는 집이 많다’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거주의 관점에서는 접근할 수 있는 집은 점점 줄어든다. 집값이 오르고, 전세금이 오르고, 월세가 오를수록,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은 사라진다. 도시에는 텅 빈 아파트들과 그곳에 살 수 없는 사람들만 남겨진다. 청년들은 이 체계 속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간다. 하지만 도시의 집값과 전세금은 이미 도시로 일하러 오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처럼 상승한다. 도시 중심부는 투자 가치가 높을수록 주거 비용도 커진다. 청년들이 낼 수 있는 월세 범위는 점점 좁혀진다. 서울에 와야 하는데 서울에 살 수 없다.

그래서 청년들은 지하, 반지하, 옥탑, 고시원으로 밀려난다. 이 공간들이 단순한 저렴한 주거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법적으로 이들이 사는 주거는 ‘주거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 속한다.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노숙인 등’에 속한다. 즉 청년들은 이미 ‘홈리스’의 범주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차이는 그들을 홈리스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지하, 반지하, 옥탑, 고시원들 또한 부동산 상품이다. 투기꾼들이 매입한 빌라, 다세대주택의 지하방들. 청년들이 이곳에 들어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도시의 주거 구조가 그들을 밀어낸 결과다. 도시는 모두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도시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은 점점 제한되고 있다. 시간이 있다고 생각되는 청년의 경우에는 희망을 품게 된다. 저축하고, 월급이 오르고, 주식 투자에 성공하는 그 ‘언젠가’를 위해 현재의 주거 불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있고, 신용이 있고, 월세를 낼 만한 급여가 보장된 사람들이 산다. 도시인은 이들을 상정한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 신용등급이 없는 사람, 월급이 없는 사람. 이들은 도시에 어디에 살 수 있을까. 어쩌면 도시의 입장에서 그들은 계산 밖의 사람들이다. 홈리스들은 도시에 있으면서도 도시의 설계 바깥에 있다.

 

‘고시텔’ ⓒ 심규동

 

그렇다면 도시는 이들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한국의 도시는 한 가지 선택을 해왔다. 시설이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그들을 시설에 수용했다. 시설은 도시의 관점에서는 ‘문제 해결’이었다.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해결이라면 시설은 효과적이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을 도시에서 걷어내고 그곳에 두는 것. 이것이 도시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노숙인이라는 용어가 생기기 전, 그들은 ‘부랑인’이라고 불렸다. 부랑인은 질서 위반자를 의미했다. 그들은 통제의 대상이었고 시설에 격리·수용되었다. 거리를 떠도는 사람을 사회 질서의 위협으로 판단해 시설로 그들을 처리했다.

지금은 다르다. IMF 경제위기 이후, 노숙인은 더 이상 질서 위반자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됐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는 논리 안에서도 여전히 시설은 주류다. 더 큰 문제는 도시는 자신의 홈리스 문제의 규모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은폐한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가 파악하는 ‘노숙인 등’의 수는 1만 2,725명(2024년)이다. 하지만 국토교통부가 파악한 쪽방, 고시원, 비닐하우스, 여인숙 등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하는 가구는 44만 3,126가구(2022년)다. 거의 35배의 차이다. 보건복지부는 5개 지역(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의 쪽방 상담소를 통해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만 ‘노숙인 등’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쪽방 상담소가 없는 다른 지역 쪽방 주민들은 통계에서 사라진다. 도시는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으로 만든다.

 

 

깊고, 기우고, 기만한 건물들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 ©김정민

 

 

이 말은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다. 서울의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이 그 예다. 종로 3가 뒷골목에 있는 이곳은 젠트리피케이션이 한창인 종로 3가의 유흥 거리와 겨우 몇 건물 떨어져 있다. 누군가는 그곳의 존재를 모른다. 이것도 도시의 선택이다. 그 사람들을 보지 않는 도시의 방식이다.

 

돈의동 쪽방은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이곳은 골목으로 거주와 위생이 넘쳐흐른다. 길이 없는 건물은 보이지 않게 된다. <깊고 기우고 기만한 건물들>, 《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 김정민

 

노숙인 생활시설에는 이미 수천 명이 장기 입소해 있다. 20~30년을 시설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한 복지라는 이름 아래, 도시는 여전히 그들을 격리한다. 다만 예전처럼 강압적이지 않을 뿐이다.

시설이 문제인 이유는 간단하다. 집이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에게 ‘시설’을 주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과 건강을 잃고, 사회적 관계가 끊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관리’나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것인 ‘집’이다. 집 없이는 일도 하기 어렵다. 면접을 보려고 해도 주소가 필요하다. 건강을 관리하려고 해도 기본적인 위생이 필요하다. 사회적 관계를 복구하려고 해도 나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시설은 이 모든 것을 대신 제공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의존성을 높일 뿐이다.

도시가 정말로 집이 필요한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되려면, 집은 나의 노력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 자활을 증명하면 주어지는 것도, 행동 개선의 대가도 아니어야 한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여야 한다. 이것이 핀란드가 홈리스 문제를 줄일 수 있었던 이유다. 그들은 주거 우선 전략으로 전환했다. 집을 먼저 제공한 다음 필요한 일자리 지원, 의료 지원, 사회 서비스를 추가 지원하는 방식이다. 한국처럼 계단을 올라와야 집이라는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부터 집을 가질 수 있다. 집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이 시작될 수 있다는 논리다.

우리의 도시도 이러한 모습을 갖출 수 있을까? 집이 많은 도시에서 왜 모든 사람이 집을 가질 수 없을까 하는 질문은 결국 이 문제로 수렴된다. 집은 투자 대상이고, 시설은 관리의 대상이며, 그 사이에서 집이 필요한 사람들은 도시의 바깥에 남겨진다.

집이 필요한 모두를 위한 도시. 그것은 건축 기술의 문제도, 공급의 문제도 아니다. 도시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지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문제다.

 

김정민 Jungmin Kim

김정민은 건축을 기반으로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이자 연구자다. 공간에서 살아가는 주체들, 특히 자신만의 공간이 없는 존재들 –소수자, 식물, 동물, 건축과 자연 등 –에 관심을 두고 글과 전시, 책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왔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SoA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도시연구단체 ‘서울퀴어콜렉티브’를 창립해 국립현대미술관 프로젝트와 ‘타자 종로3가, 종로3가 타자’ 등을 통해 지역성과 정체성에 대한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는 청년 주거와 공간에 대한 비평적 시선으로 에세이집 ‘즐거운 남의 집’을 출간했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 속 소수자의 공간 창출을 주제로 석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WHAT I MEAN을 개소해 디자인과 연구를 하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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