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벽돌 건물이 만드는 작은 문화마을
글 & 사진. 김선아 에디터. 김태진
[오늘도 도서관]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공간일까요? 어쩌면 그 이상으로 누군가에게는 사색의 시간을 갖는 피난처이자 필요한 지식을 탐색하는 보고이며, 때로는 도시를 여행할 때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이기도 합니다. 같은 목적으로 설계된 공간이라 할지라도 도서관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용자를 맞이하고, 책과 사람, 그리고 도시와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들 곁에 있는 도서관의 공간적 특성과 건축적 가치, 그리고 그 안에서 흐르는 시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도서관을 하나의 건축적 경험으로 탐색하는 여정입니다. 좋은 공간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도서관이 많아진다면, 더 나은 도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도서관은 어디인가요?
글 싣는 순서.
① 나선으로 물결치는 지붕 사이로 – 서울시 성북구 오동근린공원 ‘오동숲속도서관’
② 반복의 구조가 가지는 힘 – 서울시 도봉구 ‘김근태기념도서관’
③ 층층이 쌓인 콘크리트 슬래브와 100년의 역사 – 서울시 용산구 ‘남산도서관’
④ 주민들이 상상하고 구현하는 골목 도서관 –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 도서관마을’
⑤ 단순한 조형이 만들어 내는 기적의 도서관 – 강원도 인제군 ‘인제 기적의 도서관’
⑥ 붉은 벽돌 건물이 만드는 작은 문화마을 – 서울시 중구 ‘손기정문화도서관’
⑦ 평창동에 자리 잡은 미술 아카이브 – 서울시 종로구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⑧ 땅에 스며든 도서관 – 서울시 서초구 ‘방배숲환경도서관’
⑨ 한옥과 도서관의 판타지 – 경상북도 경주시 ‘신라천년서고’
⑩ 흐르는 것들의 자리 – 전라북도 전주시 ‘아중호수도서관’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새파랗던 나뭇잎은 어느새 노란빛을 띠고, 사람들은 외부로 나와 취미를 즐기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또 누군가는 도서관을 찾아와 책장을 넘긴다. 가을은 몸을 움직이기에도, 독서와 사색을 즐기기에도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서울역 서부 출구에서 아파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 올라가면, 도심 속 작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손기정체육공원’이 나타난다.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이 공원은 마치 도시의 소음을 차단하는 완충지대처럼 고요하다. 큰길에서 보이지 않아, 근처를 지나면서도 이곳에 운동과 독서, 문화생활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작은 단지가 있음을 상상하지 못했다.
언덕의 완만한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며 테니스장과 농구코트, 게이트볼장을 만난다. 공원 곳곳에서는 러닝복 차림의 주민들이 트랙을 도는 모습과,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일상의 동선으로 이곳을 지나는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손기정기념관, 손기정문화센터, 그리고 손기정문화도서관. 지형의 레벨 차를 활용해 자연스럽게 단을 이루는 이 건물들은 방문객에게 마치 작은 마을의 골목을 오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문화체육마을이 된 손기정의 모교
녹음이 우거진 이 언덕 위, 세 채의 붉은 벽돌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붉은 벽돌과, 우뚝 솟은 굴뚝, 살포시 지붕을 덮은 녹색 빛 기와의 생김새가 이 건물들이 모두 같은 시대를 겪은 형제들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곳은 처음부터 도서관이었을까?
가장 먼저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손기정기념관을 지나며, 손기정 선수와 이 건물들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1910~20년대 지어진 이 2층짜리 나지막한 건물들은 손기정 선수의 모교였던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이다. 학교로 쓰였던 건축물은 손기정 선수를 기리기 위해 리모델링을 거쳐 손기정기념관, 손기정문화센터, 그리고 손기정문화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딴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가 청춘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이다. 1918년, 양정의숙은 만리동에 새 교사를 신축하며 이전해 왔다.

1988년, 양정고등학교가 목동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학교가 떠난 자리는 손기정근린공원으로 조성되었고, 1994년에는 작은 마을문고가 문을 열었다. 1999년, 이 마을문고는 손기정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작은 도서관 규모에 불과했다.
변화는 ‘서울로7017’이 조성되고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이용자가 급증하자 작은 도서관은 공공도서관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2021년, 22년 만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의 손기정문화도서관이 탄생했다. 이전 도서관의 3배 규모인 771㎡로 확장된 이 공간은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 손기정체육공원 내에서 문화와 예술, 체육까지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의 중심이 되었다.


오래된 벽돌 건물에 남은 시대의 흔적
건축물 내외부에는 자연스레 시대의 흔적이 남는다. 건축물의 양식은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모여 만드는 거대한 하나의 흐름이고 물결이다. 손기정문화도서관과 주변 건물들에도 현대 벽돌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난 시대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굴뚝이다. 세 건물의 지붕 위로 솟아오른 굴뚝은 그리 높지 않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단순히 벽돌로 마감하지 않고 작은 지붕을 얹어 본 건물과의 연계를 보여주는 디테일이 인상적이다. 난방 방식이 바뀐 지금, 이 굴뚝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지만, 시간을 증언하는 조형물처럼 서 있다.



창호의 양식 역시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학교였던 공간답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창문들은 현대처럼 가로로 넓게 뚫린 것이 아니라, 좁고 길쭉한 형태를 띤다. 수직으로 강조된 이 창문들은 당시 근대 건축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특히 손기정기념관 지상 1층에서는 창문의 개구부를 석재와 벽돌로 두르며 강조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창문이 단순한 개구부가 아니라 입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세 건물을 거닐다 보면 입구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대 공공건축이 만들어내는 거대하고 명확한 입구성과 달리, 이곳의 입구들은 나지막하고 소박하다. 어느 하나 눈에 튀지 않고 서로 어우러진다. 때로는 건물 사이를 걸으며 입구를 찾아야 할 때도 있다. 이러한 절제된 입구는 오히려 친근함을 만들어낸다. 마치 동네 어귀를 지나듯,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곡선의 책장이 만들어 내는 경쾌한 도서관
오래되어 얼핏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예상을 뒤엎는 경쾌한 공간이 펼쳐진다. 학교로 사용되었던 건물에 있었을 내벽들은 모두 철거되어 하나의 열린 공간이 되었다. 주민들의 오랜 공부방으로 쓰였던 손기정작은도서관은 리모델링을 거쳐 번듯한 문화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입구 바로 앞에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커다란 계단이 놓여 있다. 높은 층고의 공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이 계단은 방문객들을 자연스럽게 2층 열람실로 이끈다. 하지만 단순한 동선만은 아니다. 계단 사이사이에는 긴 나무 의자와 방석이 놓여 있어, 신발을 벗고 편히 앉아 독서를 즐길 수 있다. 마치 집 안의 다락방 같은 친밀감을 주는 이 공간은 공공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2층으로 올라오면 물결이 흐르듯 유려하게 공간을 가로지르는 곡선형 책장을 만나게 된다. 벽 대신 책장으로 공간을 구분한 이 방식은 여러 자그마한 영역들을 만들어낸다. 책장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장소를 넘어, 방문객들이 원하는 분위기를 골라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책장 사이에 둘러싸여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샹들리에가 드리워진 널찍한 대형 테이블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창가 쪽으로는 캠핑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다. 외부에서도 눈에 띄었던 좁고 길쭉한 창문 옆에서, 마치 소풍을 나온 것처럼 가을날의 따사로운 햇볕과 더불어 독서를 즐길 수 있다. 창밖으로는 손기정체육공원의 나무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키며 자라온 나무들이 도서관 내부로 초록빛을 들여온다.

내부 공간은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성격을 얻었다. 작은 도서관 시절 주민들이 주로 공부 공간으로 활용했던 기억을 담아 거실 같은 편안함을 주는 소파, 캠핑을 테마로 한 독서 공간,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코너까지, 공간마다 다른 개성과 분위기를 연출한다. 책장 사이를 거닐다 보면, 마치 여러 방을 가진 집을 탐험하는 듯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바람은 시원하고 햇볕은 따스한 가을날, 우연히 만나게 될 좋은 책을 기대하며, 손기정체육공원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100년 된 붉은 벽돌 건물 안에서 책을 펼치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녹음을 바라보는 시간. 러닝을 마친 후 도서관에 들러도 좋고, 산책 중 우연히 마주친 이 작은 마을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을 것이다. 학교에서 공원으로, 공원에서 도서관으로 변모해 온 이 공간은 여전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건축 형태.
서울특별시 중구청에서 주도 리노베이션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손기정로 101-3
대지면적.
29,682.20㎡
연면적.
445.00㎡
김선아 Seona Kim
김선아 필자는 건축하고, 사진을 찍는다. 디자인 스튜디오 스투키Studio Stuckyi에서 공간과 브랜드를 기획하고 구체화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띵크오브미Think of Me에서는 공간을 개발하는 디벨로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건축 설계와 공간 디자인, 브랜딩을 아우르며 공간을 다루는 방식의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으며, 좋은 공간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도시 역시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