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임있는 태도가 만든 ‘시로SHIRO’의 팝업 스토어
글 & 사진. 김태진 자료. 시로SHIRO
– 빠르게 소비되는 팝업의 관성에서 벗어난 시로의 팝업 공간
– 을지로와 문래동에서 수집한 폐자재를 주재료로…
– 디자이너 오구라 히로유키 인터뷰
팝업 스토어는 오늘날 공간 소비 비즈니스의 최전선에 놓인 모델이다. 불확실성이 커진 시장 환경 속에서 짧은 기간 공간을 점유하고 이동하는 방식은 브랜드와 건물주 모두에게 현실적인 대안으로 작동해왔다. 고정 임대를 전제로 하지 않기에 브랜드는 실패의 부담을 줄일 수 있고, 건물주는 새로운 매장이 주기적으로 열리며 공간을 지속적으로 노출할 수 있다.

불확실성을 나눠갖는 구조에서 팝업은 장소의 목적이 이미지 생산을 중심에 맞춰져 있다. 단기간에 소비자의 시선을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를 위해 1회성의 자극적인 조형물이 설치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철거와 폐기가 반복된다. 그 결과 팝업은 유제품처럼 생산과 동시에 짧은 유통기한을 갖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일본의 코스메틱 브랜드 ‘시로SHIRO’는 다른 선택을 시도했다. ‘빌려 쓰고, 다시 돌려주며, 버리지 않는’ 팝업 스토어를 만드는 일이다. 자연 유래 성분을 기반으로 향수와 스킨케어 제품을 선보여온 시로는 이번 팝업에서 이미지를 남기는 일이 팝업이라면, 다음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 태도를 남기고자 했다. 지난 12월 11일부터 17일까지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시로 팝업 스토어’는 브랜드가 공간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하나의 실험장이었다.

태도가 브랜드로 치환될 때
지역의 재료를 찾을 때까지
시로의 공간은 언제나 현장에서 시작된다. 시로는 매장을 기획할 때 먼저 그 지역을 걷는다. 지도 위에서 콘셉트를 정하거나 트렌드를 호출하기보다 그곳에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어떻게 쓰이다 남겨지는 지를 추적한다. 재료는 사람을 만나고 재료를 만져보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그것이 시로가 말하는 ‘필드워크’다.
이 필드워크는 단순한 리서치가 아니다. 시로는 상품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지만 여전히 쓰일 수 있는 재료를 찾는다. 규격에서 벗어났거나, 공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탈락했거나,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자투리 등을 찾아 디자인을 통해 사용성을 부여한다. 이를 위해 직접 공장을 찾아가고 작업장을 두드린다. 때로는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의심을 사기도 한다. 과정은 쉽지 않지만 여러 차례 다가가다 보면 결국 마음을 여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시로가 오랫동안 쌓아온 원칙이다.
시로는 지역의 역사와 산업, 생활의 결을 품은 재료를 통해 공간을 구성해왔다. 이 방식은 성수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도 이어진 방식이다. 필드워크는 재료를 수집하는 과정이자 공간이 놓일 지역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시로에게 매장은 상품을 진열하는 장소 이전에 그 지역이 지나온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을지로에서 만난 목재 팔레트
팝업 스토어에 사용된 첫 번째 재료는 을지로3가 일대 인쇄소 골목에서 발견했다. 시로 팀은 그곳에서 목재 팔레트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과적이나 충격으로 파손되는 순간 다른 용도를 찾기 어려워 그대로 방치된 것들이었다. 팔레트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탐험선처럼 여기저기 찍혀있거나 골조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시로 팀은 서울 시내 여러 배송 업체를 직접 돌며 같은 이유로 쓸 곳을 잃은 목재를 수집했다. 이 목재들은 디자이너의 기획을 거쳐 그대로 사용되거나 분해와 재조립을 거쳐 팝업 스토어 중앙의 스톡 박스와 카운터, 집기로 쓰였다.
새것으로 가득한 백화점에서 폐자재가 상품의 받침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생산 과정의 끝자락에서 팝업의 중심으로, 폐기의 직전에서 사용의 한가운데로 옮겨온 것이다.




문래동에서 만난 두 번째 재료
두 번째 재료는 금속이었다. 여의도 인근 문래동 철공소에서 발견한 금속 자투리다. 프라이팬과 선반, 의자 같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금형으로 필요한 부분만 타공하고 남은 조각들이다. 동일한 품질의 금속이지만 형태가 완성되는 순간 ‘남은 것’으로 분류된다.
이 금속 자투리는 매장 중앙의 재고 벽채의 문손잡이가 되었고 타공된 금속판은 제품의 상판으로 활용됐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금속판이 철공소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팝업이 끝나면 다시 문래동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예정이다.


팝업이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순간
세 번째 장면은 도장 업체에 쌓여 있던 페인트 통에서 시작된다. 각 현장에 맞춰 조색된 페인트는 특정한 맥락에 종속돼 있어, 콘셉트가 분명한 다른 공간에서는 재사용되기 어렵다. 남은 페인트는 고형제를 섞어 굳혀 폐기해야 하고 페인트가 묻은 통 역시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이 문제의식은 시로 팀이 이번 팝업을 준비하며 도장 업체를 찾았을 때 비로소 선명해졌다. 그곳에서 올 봄 문을 연 시로 성수 매장을 만들며 사용했던 페인트를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시로 성수 매장을 조성할 당시에는 남은 페인트가 어떤 경로로 처리되는 지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필드워크 과정에서 그 페인트를 다시 발견한 이마이 회장은, 성수 매장에서 사용하고 남은 재료인 만큼 반드시 버리지 말고 끝까지 활용하자며 이번 팝업에 쓰일 것을 직접 제안했다.
그렇게 버려질 예정이던 페인트와 페인트 통은 이번 팝업에서 물감이 되었고 팔레트의 다리가 되었다. 통 안에 남아 있던 흰색 계열의 페인트 가운데 실제로 사용할 색을 골라 목재 팔레트와 페인트 통을 다시 칠했다. 직원들이 합심해 페인트 통을 칠했다. 디자이너는 “완벽하게 칠하려 하지 말고, 마음 가는 만큼만 칠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팝업이 남길 수 있는 것
시로의 팝업은 결과를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왜 버려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쓰였는 지를 드러낸다. 이 공간에 남는 것은 물성이 아니라 태도다. 공간을 소비하되 그 시간에 발생하는 생산과 폐기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태도이다.
팝업이 점점 더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이 공간은 속도를 높이는 대신 경로를 묻는다. 재료가 이동한 과정과 사용의 흔적 그리고 다시 돌아갈 자리까지 함께 보여준다. 공간은 잠시 머무는 팝업이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 묻는 하나의 질문처럼 서 있다.


오구라 히로유키 디자이너 인터뷰:
새로 만들지 않고 디자인한다는 것, 그리고 ‘만드는 책임’에 대하여
시로SHIRO의 디자인은 ‘새로 만들지 않고 디자인한다’는 점에서 매번 새로운 도전처럼 느껴집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마치고 느낀 소회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프로젝트는 필드워크에서 출발했습니다. 서울의 여러 장소를 직접 걷고 사람들을 만나며 시작했죠. 그 과정에서 저 자신도, 시로SHIRO도 한국과의 거리가 확실히 가까워졌다고 느꼈습니다. 온라인 검색으로는 얻기 어려운 감각이 있습니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온도와 밀도 같은 것들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런 체험이 차곡차곡 쌓이며 방향이 잡혔습니다.
필드워크 과정에서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지은 장면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산업폐기물 처리장에 갔을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들어온 산업폐기물로 휴게실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디자인의 본질적인 힘은 이런 것 아닐까’라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제한된 재료로 작업하는 일은 분명 한계도 따를 것 같습니다. 이 과정은 힘든 쪽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즐거움에 가까운가요.
물론 힘든 점도 많습니다. 손이 많이 가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도 자주 생깁니다.
하지만 일본 역시 과거에는 물자가 부족한 시기를 지나왔고, 그때 사람들은 지혜를 모아 생활했습니다. 지금은 너무 편리한 시대가 되면서 그런 ‘궁리’의 과정이 줄어들었다고 느낍니다. 저는 디자인을 통해 그 궁리를 다시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작업은 힘들지만 동시에 즐겁습니다.
AI 기반 도구가 빠르게 확산되는 시대입니다. SHIRO의 방식은 현장에 가서 직접 만지고 체험하는 아날로그한 프로세스에 가깝습니다. 이런 방식의 가치를 더 체감하고 계신가요.
AI의 효율성과 가능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실제로 유효한 부분에서는 활용합니다.
다만 체험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가서 보고 만지고 느낀 것을 형태로 만들고 그 체험을 다시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AI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이런 체험의 가치는 더 선명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만드는 책임’이라는 모토가 인상 깊었습니다. 이 문장에 담긴 생각을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무언가를 만들 때 처음부터 버려질 것을 전제로 만드는 지, 오래 사용할 것을 전제로 만드는 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지금 사회는 편리함을 중심으로 빠르게 쓰고 버리는 구조에 익숙해졌습니다. 저는 그 흐름을 조금씩이라도 늦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거나, 이미 버려진 것을 새로운 가치로 되살리는 것. 그것이 지금 디자인이 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향의 디자인이 ‘나에게 맞는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코로나 시기에 많은 프로젝트가 멈췄을 때였습니다. 이전에는 소비의 흐름 속에서 바쁘게 달려왔다면, 멈춰진 시간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 어떤 디자인이 미래에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를 고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금액이나 효율보다는 버려지는 자재를 다시 바라보고 가치를 바꾸는 일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디자인은 디자이너 혼자만의 의지로는 어렵습니다. SHIRO와의 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요.
SHIRO와의 관계는 일반적인 클라이언트 관계라기보다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달리는 팀 메이트에 가깝습니다.
프로젝트마다 도전적인 조건이 주어지지만 결과가 기대와 다르더라도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 지를 함께 공유합니다. 부족했던 부분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보완할지 논의합니다. 이런 신뢰가 있어야 지속 가능한 선택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협업 과정에서 ‘답이 보이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같은 장소를 보고 같은 재료를 만지며 같은 경험을 공유할 때입니다. 말로만 논의할 때보다 현장을 함께 걷고 체험할 때 자연스럽게 방향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필드워크하는 과정에서 단서가 하나씩 쌓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제약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마주한 한계는 무엇이었나요.
모든 것을 100퍼센트 폐자재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바닥재는 이전 팝업에서 가져오거나 대여하거나 아예 깔지 않는 방식까지 검토했지만 백화점의 규정과 안전 문제로 새 자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했던 것은 무리해서 이상을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이번에 새로 사용한 자재를 다음에는 어떻게 다시 쓸 수 있을 지까지 함께 고민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쓸 것까지 생각한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가요.
예를 들면 이번에 사용한 카펫을 팔레트 사이즈로 잘라 구조물로 재사용하는 방식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완성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용을 함께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폐자재를 활용하면 비용이 더 저렴할 것이라는 인식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어떤가요.
재료 자체의 비용은 낮은 편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손이 많이 갑니다. 노동과 시간의 비중이 커지기 때문에 전체 비용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다만 이번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비교적 합리적인 비용 안에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렴함이 아니라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과정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관람객이 무엇을 느끼길 바라셨나요.
완성된 모습만 보기보다 이 공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 지를 느꼈으면 합니다. 재료가 이동한 경로와 사용의 흔적 그리고 다시 돌아갈 자리까지.
잠시 머무는 공간이라도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은 남길 수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