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의 땅끝에 가다
글&사진. 최성우 에디터. 김태진
[이베리아반도 유랑기] 오래전부터 막연히 가보고 싶었던 포르투와 알함브라. 두 도시를 지도에 핀으로 찍고 출발한 여행, 단 하나의 숙소만 예약한 채 아무런 정보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여행보다 ‘유랑’에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다시 지중해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며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남프랑스의 25개 도시와 지역을 64일 동안 거닐며 기록한 유랑일지입니다.
글 싣는 순서.
① 포르투, 무엇으로부터 매력을 느꼈는가 – 포르투에서 만난 장면들
② 유럽의 땅끝에 가다 – 호카곶과 사그레스 요새
③ 60년의 여정, 건축은 멈추지 않는다 – 레사 조수 풀장 Piscina das Marés
④ 시민에게 사랑받는 축구 클럽과 채석장 위에 세워진 경기장 – 브라가 시립 경기장 Estádio Municipal de Braga
⑤ 미술관 곁에는 늘 정원이 있었다 – 세할브스Serralves, 굴벤키안Gulbenkian, 파울라 헤구Paula Rego 미술관
“포르투갈 정복해요?”
나의 여행 일정을 듣더니 런던에 있는 동생이 한 말이다. 포르투에서 시작된 여정은 조금씩 남쪽으로 가며, 단 하나의 도시도 허투루 지나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능한 1시간 반 내외의 거리로만 이동했다. ‘정복’이라는 단어에 꽂혀 여행의 부제를 ‘포르투갈 정복기’로 정하고 틈틈이 여행기를 적어 갔다. 다음 도시는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유럽의 끝, ‘호카곶’이 지도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리스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대서양과 만나는 유럽의 서쪽 끝 호카곶과 망망대해 대서양을 뾰족하게 마주하고 있는 남쪽 끝 사그레스 요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포르투갈을 기준으로 가장 남쪽은 파루 Faro요, 유럽을 기준으로 하면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지브롤터해협에 위치한 스페인 타리파Tarifa가 최남단이다. 다만, 대서양의 최전선에 위치한 사그레스의 매력을 나누고 싶어 포르투갈 최남쪽으로 선택했다.

서쪽 끝, 호카곶(Cabo da Roca)
리스본 출발, 신트라 도착
호카곶은 리스본Lisbon 인근 소도시 신트라Sintra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리스본 호시우역(Esta o Ferrovi ria do Rossi)에서 신트라역까지 기차로 약 40분 걸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역을 나오자마자 뛰어들어 탄 버스로 1시간을 더 들어가야 한다. 버스의 배차간격이 20~30분이기 때문에 바로 탈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리스본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화창한 날씨로 잔뜩 설렜는데, 바닷가를 향해 가고 있어서일까? 구름이 가득해져 있었다. 심술을 부리는 건지 버스가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파란 하늘이 나타나고 있었다.
신트라의 도로는 전반적으로 좁다. 도심은 양방향 차선이지만, 지금 달리는 도로는 차가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폭이었다. 여기서 놀라웠던 점 하나! 버스 기사님의 거침없는 질주!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감각과는 다르게 전혀 빠른 속도가 아니고 안전속도를 준수하고 있었다. 굽이굽이 골목과 산길이 롤러코스터 레일처럼 느껴진 것이다.
버스의 종점이자 호카곶 여행안내소에 도착했다. 해무가 잔뜩 끼어 있어 방향 감각을 잃을 정도였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등대가 자리하고 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곳을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유럽 땅끝에 도달하다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호카곶 표지석에 새겨진 포르투갈의 위대함을 찬양한 애국적 대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íadas’를 집필한 루이스 드 카몽이스Luis de Camões의 시구다. 바로 아래 “유럽 대륙의 서쪽 끝(Ponta Mais Ocidental Do Continente Europeu)”이라는 문구와 함께 위도, 경도, 고도까지 명확히 표기하고 있다. 이 표지석은 1979년 신트라 시청에서 세웠다. 맞은편에 또 다른 기념비가 보였다. 로터리클럽 설립 75주년을 기념해 설립자 폴 해리스Paul Harris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표지석이 세워지고 1년 뒤 1980년에 만들었다.
호카곶 표지석 앞은 늘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벼 표지석 사진 찍을 타이밍을 잡기가 무척 어려웠다. 앞사람이 사진을 찍고 다음 사람이 이동하는 단 몇 초가 나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다시 바다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이곳이 대서양이로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짙게 낀 해무로 잘 보이지 않아 신비함만 더해졌다. 안개가 걷히길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등대마저 공사 중이라 방문이 어려운 듯했고, 이대로 신트라 시내로 되돌아가야 하나 하던 찰나에 커다란 바위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장면이 보였다.



뜻밖의 트레킹
호카곶은 절벽으로 맞닿아 있어 해변으로 직접 접근할 수 없다. 이것은 해안 절벽을 이루는 호카곶의 지질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신트라 산맥이 대서양으로 뻗어 나가며 형성되는 과정에서 화강암이 풍화로 인해 침식되면서 절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호카곶의 뾰족하게 튀어나온 지형 탓에 대항해시대에는 ‘리스본의 바위(Rock of Lisbon)’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나는 바위에 앉아 유럽 땅끝의 기상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것이 곧 행동으로 이어져 뜻밖의 트레킹이 시작됐다. 흙길이 기본이긴 했지만, 경사가 가파른 코스였기 때문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보려고 하니 한참 고개를 들어야 했다. 이미 앉을 만한 자리에는 사람들이 다 자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갔는지 절벽 맨 끝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손에서 땀이 난다. 호카곶 표지석 주변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곳에는 전혀 안전장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 안전요원 또한 당연히 없다. 바위 위에서는 거의 앉아서 이동했다. 그때 드디어 파란 하늘이 잠시나마 인사를 해주었다. 가까워져서인지 바다도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에서 10분을 더 내려가 마주한 루리샬 해변(Praia do Louriçal). 하지만 이곳에서도 바닷물에 다가갈 수 없었다. 자갈 해변에 당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절벽으로 길이 막혀 있었다. 강한 바람과 날아오는 바닷물에 적응한 작은 키의 식물들로 뒤덮여 있다. 나무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능선이 다육식물로 가득 찬 광경이 마치 고생대와 같은 오래전 지구에 내려와 있는 듯했다.



남쪽 끝, 사그레스 요새(Fortaleza de Sagres)
라구스Lagos에서 시작된 여정
모 게임사의 ‘대항해시대2’에서 들었을까? 포르투갈 도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맥주 이름으로 알게 된 걸까? 사그레스Sagres라는 이름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대서양에 접한 유럽의 남서쪽 끝이라는 위치조차 가야 할 이유로 완벽했다. 라구스에서 체크아웃 하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사그레스에 들렸다가 다시 돌아와서 숙소에 맡겼던 짐을 챙겨 다음 도시로 떠나는 완벽한 계획을 짜고 시작한 여정이었다. 라구스의 버스터미널은 매우 간소했다. 정차하는 플랫폼도 단 두 곳, 심지어 매표소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문을 닫았다. 사그레스는 더욱 놀랍다. 버스터미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의 끝 로터리 종점에서 쉬지 않고 라구스로 다시 되돌아가는 노선이었다.

정확히 1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 건물이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여기서 점심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요새로 바로 향했다. 집들 사이 골목을 빠져 나오자, 벌판이 펼쳐졌다. 주변에 건물은 눈앞에 보이는 성벽만이 전부였다. 조금 전까지 마을 안에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떨어진 기분도 들었다. 자동차가 없었던 시절, 성과 성을 오갈 때의 풍경이 이와 같지 않을까.

벌판 가운데 우뚝 솟은 성벽, 웅장한 자태
성문을 지나 동굴과 같은 성벽 내부를 거쳐 성안으로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 밖으로 텅 비어 있어 놀랐다. 사그레스곶은 지리적으로 변방이다. 14세기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고, 15세기 중반, 항해왕 엔히크(Henrique o Navegador, 1394~1460)의 영지로 편입되면서 마을과 요새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엔히크 왕자 사후, 1587년 영국의 침략으로 요새가 파괴되고 마을이 약탈당했고,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여파로 요새가 대부분 붕괴한 이후 재건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이후 더 이상 요새의 기능을 상실하고 국가 기념물로 등재되었지만, 예전의 번성했던 모습을 되살릴 수는 없었나 보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을 발견했다. 오늘날 사그레스 요새의 신화를 만들어낸 엔히크 왕자다. 그는 아비스 왕조(House of Aviz) 주앙1세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나 사실상 왕권에서는 멀어졌지만, 몽상가라 불릴 만큼 특유의 기질로 대항해시대를 끌어낸 핵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주앙1세는 세우타 총독, 비제우 공작, 알가브르 총독, 그리스도 기사단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곳에 요새는 물론, 왕자의 마을(Vila do Infante)라 불린 공동체, 항해 학교 등을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지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탐험가, 항해자, 항해 기구 제작자 등을 모아 항해 학교를 비롯해 천문소, 조선소, 연구소를 만들었다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전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활기가 넘쳤을 거리의 풍경을 표지판의 설명 문구에 의존해 상상해 보아야 했다. 마침, 땅에 그려진 거대한 원과 수십 개의 나무 말뚝에 연결된 줄이 보인다. 로자 두스 벤투스(Rosa dos Ventos, 영어로는 Wind Rose)라 불리는 이 설치물은 붙여진 이름처럼 바람의 방향과 분포를 측정했던 도구였다는 설과 해시계였다는 설이 있을 뿐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고 한다. 성 내부에서 건물 크기의 바닥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정말로 당시에도 있었던 시설인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또 하나 남아 있는 건물은 성당, 은총의 성모 교회(Igreja de Nossa Senhora da Graça)다. 1570년 건립된 것으로 방문 당시 공사가 진행 중인지 문은 잠겨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현재 세워진 건물은 복원된 것으로 옛 그림을 기록에 따라 세운 것이라 한다. 외롭게 서 있는 성당을 마주하니 문득 16세기의 장면을 상상해 봤다. 막사에 쉬고 있거나 훈련 중인 병사들, 성벽 위에서 잔뜩 시야를 넓혀 경계 근무를 서 있는 병사들, 교회에서 때에 따라 울려 퍼지는 종소리, 상인들이 들어오면 장이 서는 날들, 해자 위로 펼쳐진 나무다리 너머 성문 앞에서 검문하는 모습들. 절벽 너머에서 아득하게 보이는 함대의 그림자와 같은 영화적 상상도 더해본다.


묵묵히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지켜주고 있는 등대
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현대 건축물을 지나 곧게 뻗은 산책로로 향하니 성 밖 마을에서 요새를 바라볼 때와 비슷한 감정에 다시 한번 휩싸였다. 초원이 펼쳐진 사이에 하나의 실과 같은 길의 끝에 사그레스 곶 등대가 보이는 것이다. 등대가 보이니 미처 방문하지 못한 상 비센테 등대(Farol do Cabo de São Vicente)가 떠올랐다. 사그레스 시내에서 대중교통으로 20~30분만 달리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수녀원 부지 위에 지어진 최초의 등대는 1520년에 건설되었다. 8세기 인물인 상 비센테를 기려 성지가 된 이곳에 등대가 세워져 대항해시대에 수많은 배의 안전을 지켜주었던 그때의 광채가 상상되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깎아지는 절벽 앞에 서자 감회가 새로웠다. 뚜렷이 보이는 대서양 바다 수평선 너머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 미지의 세계를, 절벽을 감아 도는 돌풍과 파도를 뚫고 나아간 15세기의 포르투갈인들이 정말 놀랍다.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바다를 향해 떠나는 선원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파도가 만들어 낸 공명, 바다의 소리(A Voz do Mar)
앞서 초원 같은 풍경이라 표현했지만, 강한 바닷바람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기후의 특성상 식물이 자라기 매우 어려운 조건이다. 이는 호카곶에서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사한 다육식물의 키 작은 식물들이 바위틈 사이로 자라있다. 그 가운데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작품 같기도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고대 성소처럼 보이기도 하는 구조물이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다의 소리(The Voice of Sea, 포르투갈어로는 A Voz do Mar)’라는 이름의 파빌리온이다. 2010년 알가르브 현대미술 프로그램의 임시 설치물로 계획된 것으로 포르투갈 건축가 판슈 게데스Pancho Guedes(1925~2015)*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프로그램의 커미셔너였던 건축가 페드루 헤사노 가르시아Pedro Ressano Garcia에 의해 영구 구조물로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판슈 게데스Pancho Guedes(1925~2015) | 포르투갈 리스본 출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 교육자이다. 어린 시절 모잠비크로 이주해, 앙골라, 남아프리카공화국, 포르투갈 등에서 활동했다. 현대 아프리카 건축의 선도적인 인물로, 건축가 그룹 팀텐Team 10의 멤버이기도 하다. 주요 작업으로는 Smiling Lion apartment building, Lourenço Marques (1956-58), Salm House, Lourenço Marques (1963-65), Casal dos Olhos (The Eye House), Eugaria, Sintra, Portugal (1972-90), City centre square project, Johannesburg (1981) 등이 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지는 여러 겹의 원형 미로를 통해 내부로 들어가 중심부에 가면 바닥이 뚫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의 독특한 지형을 활용해 제안된 것으로 앉아서 실제로 바다의 소리를 듣는 공간이다. 원형의 미로는 소리를 모으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 건축가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안쪽 원에 도달하기 전, 파도의 움직임이 중심 공간 전체를 진동으로 채우는 강한 공명을 경험하게 된다. 지면의 구멍은 지하 100미터 이상 깊이에서 바다와 연결된 자연 지질 단층이며, 사운드 카메라를 통해 파도의 소리가 그대로 전달된다.”
‘바다의 소리’ 옆에 실제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해식동굴이 있었다. 위태롭게 울타리가 쳐져 있던 그곳의 구멍은 매우 컸다. 라구스, 포르티망Portimão, 알부페이라Albufeira 등 이베리안 반도 남부 지역의 해안은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도에 의한 침식과 빗물에 의해 석회암이 부식되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라구스에서 보트 투어를 할 때에 만난 해상 동굴도 이렇게 형성된 것이다. 심지어 침식으로 인해 절벽이 무너져 해수욕장이 사라지는 현상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직접 땅을 밟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유럽의 서쪽 끝 호카곶, 최남서단 사그레스 요새, 의미 있는 두 곳의 땅을 직접 밟아 보았다. 이제는 그때의 영광이 먼지처럼 사라졌지만, 파도와 바람 속에서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는 것만 같다. 해안 절벽을 걷는 길은 여느 도시의 골목을 거니는 것과 다른 색다른 경험이었다. 정말 탐험가가 된 기분이랄까. 투쟁과 열정의 역사 속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보기도 하고, 반대로 지독하게 고독해지는 감각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아직 알지 못한 포르투갈의 이야기가.
처음 유럽행을 준비할 적에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떤 공간, 장소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3번은 가보아야 한다고. 요지는 이렇다. 처음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이 방문해 순수하게 그대로 느껴보고, 두 번째는 장소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해서 바라보고 나면, 세 번째는 두 차례의 방문에서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이를 마음에 새겨 언젠가부터 MBTI로 표현하자면, P의 여행을 하고 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사실 놓치는 부분도 많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서 더욱 온전히 느껴보려고 노력한다. 놓친다기보다 궁금한 점이 생기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시야가 트이는 것. 이것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로는 인생과도 같아.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결국 도달하게 된다.”
“O labirinto é como a própria vida, pode-se perder algum tempo, mas acaba-se sempre por lá chegar.”
“The labyrinth is like life itself, you can lose some time, but you always end up getting there.”
-판슈 게데스 Pancho Gued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