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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빈방을 채우는 방법

도시의 빈방을 채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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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태진 자료. 전상면

 

*이 기사는 정영모 독자의 제보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신 근처의 따뜻한 직거래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은 2015년, ‘당신 근처의 따뜻한 직거래’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됐다. 처음엔 손때 묻은 물건을 사고파는 단순한 거래의 공간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 곳곳에서 물건 너머의 관계와 기억이 교차하는 작은 마을처럼 진화했다. 어느새 당근은 동네 커뮤니티 공간이 된 것이다. 당근에서는 지인에게 털어놓지 못한 고민을 이웃에게 나누고, 누군가는 일손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며 정성껏 사례한다. 때때로 밤늦게 아픈 반려묘를 위해 이동장을 빌리는 일도 벌어진다.

이런 변화는 도시 구조에 미묘한 균열을 만든다. 담장 너머 집안일까지 나누던 골목 문화에서, 익명성이 지배하던 아파트 단지로 이어진 흐름에 금이 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물건을 핑계 삼아 관계를 맺고, 공간을 감각한다. 대규모 유통시스템이 지워버린 동네의 리듬을,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이 되살리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 도시적 풍경의 한 장면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서 발견했다.

전상면 작가는 오늘도 당근을 종종 살펴보며 괜찮은 물건이 있나 검색한다. 그는 당근이 정말 재밌다며 인터뷰 도중 여러 번 미소를 지어보였다. ©BRIQUE Magazine

이야기의 시작은 동네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정영모 씨의 제보였다. 그는 “근처에서 당근마켓으로 집 전체를 꾸민 분이 있다”고 했다. 주인공은 화가이자 건축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전상면 작가는 어머니가 생전 살던 2층집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던 그는 우연히 당근을 시작했고, 첫 거래로 받은 중고 소파가 공간을 새롭게 쓰는 여정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작가님의 어머님이 작년에 돌아가시고, 2층이 빈 채로 남았대요. 집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우연히 당근을 시작하셨고, 첫 물건으로 멋진 소파를 나눔받으셨대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 제보자 정영모 씨

전상면 작가가 당근에서 모은 가구에 깃든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는 모습은 마치 갤러리 큐레이터 같았다. 1만6천 원짜리, 5천 원짜리…. 하지만 값보다 중요한 건 정형화된 매장에서는 만날 수 없는 디자인과 거래 과정에서 이웃과 나눈 인사들이 숫자 위에 송골송골 맺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BRIQUE Magazine

 

공간에 채운 이웃의 온기와 기억

이야기를 들은 월요일 오후, 수원으로 향했다. 오래된 상가 건물 2층으로 난 골목길 계단을 오르자, 마치 누군가의 삶이 전시되고 있는 듯한 조용한 공간이 펼쳐졌다. 전상면 작가는 깔끔한 셔츠 차림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중년이었다. “그저 심심풀이로 당근을 했다”고 웃었지만, 그의 공간은 단순한 심심풀이로는 채울 수 없는 온기와 기억으로 가득했다.

처음엔 이 집을 숙소나 임대공간으로 쓸까 고민도 했지만, 벽과 바닥 곳곳에 남은 어머니의 흔적을 쉽게 지우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 공간을 꾸미는 데까지 약 30건의 당근 거래를 진행했고, 총 비용은 20만 원 남짓의 금액이 투입됐다. 거래의 기준도 단순했다. ‘5만 원 이하로만 살 것’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그 과정에서 이웃들과 나눈 이야기들이었다.

©BRIQUE Magazine

 

“어떤 분이 식탁을 나눠주셨는데, 나중에 제가 잘 쓰고 있다고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진짜 주인을 만난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 전상면 작가

당근 과정에서 이웃들과 나눈 메시지 <이미지 제공 = 전상면 작가>

전 작가는 좌판의 상인처럼 집 안을 누비며 물건의 사연을 하나하나 꺼내놓는다. 누가 나눔을 해줬는지,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그 모든 순간이 그의 삶에 조용한 기록처럼 남아 있다. 스탠드는 5천 원, 화병은 시장 근처 주민에게서 받은 나눔. 물건의 이동은 그에게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기억을 수집하는 행위에 가깝다. 도시 속에서 스치듯 교차한 타인의 시간, 그 조각들을 모아 그는 집을 채워간다.

연무동은 요즘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행궁동과 맞닿은 동네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겹쳐 있는, 수원의 다층적인 결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전상면 작가의 집은 그런 도시의 시간성을 압축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익숙하지 않은 중고 물건들이 한 공간에 모여 어울리는 모습. 그는 ‘꾸밈’보다는 ‘어울림’을 택했다고 했다. 겹겹이 쌓인 시간과 마음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이 집은 완성되고 있었다.

당근 거래의 기본은 ‘풀박스’. 공간 한 쪽에 당근한 조명의 박스를 보관 중이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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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먹고 자란 새로운 꿈

그는 공간을 채우는 과정에서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당근에서 얻은 경험과 아이디어, 그리고 자신의 건축·인테리어 경력을 녹여 재능 기부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누군가 바꾸고 싶은 공간이 있다면 부담 없이 솔루션을 제공하고, 돈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공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당근이라는 플랫폼이 이웃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화가이자 건축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전상면 작가. 그의 그림과 당근에서 들여온 가구들이 어우러져, 공간은 마치 하나의 전시장이 된 듯했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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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괜히 당근 앱을 다시 열어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 동네 어딘가에도 이런 공간이 하나쯤 숨어 있을지 모른다. 도시의 골목을 걷다 물건을 나누고,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며 기억을 남기는 일.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도시적 연대이자, 가장 조용한 변화의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