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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의 장례식, 힐튼서울이 남긴 이야기

건축물의 장례식, 힐튼서울이 남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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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태진 자료. 피크닉 piknic

 

건축의 생애와 도시의 장례식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나는 이름 모를 선생의 장례식에 참석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상주도, 애도사도 없는 자리에서 망자의 이야기를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대신 도면과 공문서, 구술 기록과 사진, 예술작품들이 그를 대신해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 건축의 생애를 다룬 자서전이자, 도시의 한 시대를 함께 보낸 생명체의 장례식이었다.

‘힐튼서울 자서전’은 IMF 세계은행 연차총회(1985), 아시안게임(1986), 서울올림픽(1988) 등 국제 행사의 무대였던 힐튼서울의 40년 역사를 복기하는 전시다. 피크닉은 이 전시를 통해 건축의 철거를 인간의 죽음으로, 그 죽음을 문화의 장례로 치환한다. 건축의 생애를 설계, 성장, 해체의 단계로 바라보며, 그 기억을 복원하는 일 자체를 하나의 예식으로 제안한다.

힐튼서울 자서전 포스터. 사진 최용준 <이미지 제공 = piknic>

 

힐튼서울에 대한 내 기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던 콘서트. 힐튼서울은 63빌딩과 더불어 뮤지션들의 대형 공연을 가장 자주 개최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산울림,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의 콘서트를 이곳에서 보았다. 또 하나는 ‘일폰테’라는 레스토랑이다. 스파게티집도 흔하지 않던 시절, 예쁘고 세련된 누나들은 항상 “일폰테 이탤리언이 진짜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힐튼서울은 오랫동안 나에게 친근함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오랜 운명, 힐튼호텔 자서전 중 (김범상 피크닉 대표)

힐튼서울 골조공사 (서울건축 제공), 1982 <사진 제공 = piknic>
최용준, ‘힐튼서울 프로젝트’, 2023 <사진 제공 = piknic>
최용준 ‘Archive of closure (택시정류장)’, 2023 <사진 제공 = piknic>

 

힐튼서울, 한 시대의 초상

1983년, 건축가 김종성은 남산 자락의 가파른 경사 앞에 섰다. 그는 불리한 입지 조건을 오히려 설계의 출발점으로 삼아, 지형의 흐름을 따라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조를 완성했다. 그렇게 높이 18m의 웅장한 로비가 탄생했다. 김종성은 이 로비를 ‘방문자의 정신이 고양되는 장소’로 구상하며, 단순한 사치의 상징이 아닌 도시의 공기를 품은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힐튼서울은 그렇게 한 시대의 근대성과 욕망, 그리고 경제 성장의 신화를 압축한 건축으로 자리했다. 동시에 국제 행사의 무대이자, 서울 시민과 여행자가 도시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는 공공적 장소로 기능했다.

김종성은 시카고 유학 시절, 미스 반 데어 로에 사무실에서 배운 근대 건축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국 도시의 현실과 욕망에 대응했다. 목재 벽면에는 미국 켄터키 참나무를 1.5mm 두께로 돌려 깎아, 흠집이 나더라도 샌딩만으로 복원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단단한 재료와 정교한 디테일은 시간이 흘러도 공간의 품위를 유지하고자 한 건축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임정의 ‘힐튼서울 로비’, 1983‬ <사진 제공 = piknic>
임정의 ‘힐튼서울 수영장’, 1983‬ <사진 제공 = piknic>
정지현 ‘밀레니엄 힐튼 호텔 서울_볼룸’, 2025 <사진 제공 = piknic>
정지현 ‘밀레니엄 힐튼 호텔 서울, 아트리움’, 2025 <사진 제공 = piknic>

서울 힐튼 호텔의 주요 재료는 브론즈, 녹색 대리석, 베이지색 트래버틴, 오크로 구성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색과 질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건축가 김종성의 중요한 설계 철학을 담고 있다. 특히 녹색 대리석과 베이지색 트래버틴은 그의 스승인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중시한 재료이기도 하며, 근대 건축의 원칙과 한국적 맥락을 동시에 반영하는 요소로 기능했다.

힐튼서울은 이렇게 도시적, 기술적, 심미적 차원에서 설계된 건축물이었지만, 팬데믹과 재개발의 물결 앞에서 결국 2022년 12월 31일, 40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최용준 ‘The Elements (브론즈, 대리석)’, 2022 <사진 제공 = piknic>
최용준 ‘The Elements (대리석)’, 2022 <사진 제공 = piknic>
최용준 ‘The Elements (브론즈)’, 2022 <사진 제공 = piknic>
최용준 ‘The Elements (트레버틴)’, 2022 <사진 제공 = piknic>

해체된 건축의 자서전

전시는 사라진 건축의 흔적을 입체적 언어로 복원한다. 설계 도면, 관계자 간 서신, 직원과 손님의 증언, 3D 스캔 데이터, 철거 현장에서 회수된 자재까지, 힐튼서울을 구성했던 모든 단서가 하나의 생애사를 이룬다.

전시장 초입에는 서지우 작가의 ‘싱그러운 것이 지나간 자리’가 놓였다. 철거 현장에서 수집한 대리석, 콘크리트, 마감재 파편을 재구성하여, 건축의 해체와 생성이 교차하는 시간성을 시각화한다. 이 파편들은 단순한 잔해가 아니라, 건축이 남긴 세포 조직처럼 느껴진다.

서지우 ‘숨쉬는 파사드’, 2025, 혼합매체, 가변크기 (사운드: 서민우, 2분 40초). 싱그러운 것이 지나간 자리. 철거 중인 힐튼서울의 현장에서 수집한 대리석, 콘크리트, 마감재 등의 파편을 재구성해, 해체와 생성이 교차하는 건축의 시간성과 기억을 조형적으로 되살린 작품 <사진 제공 = piknic>

 

사진 작업은 최용준, 정지현, 임정의 작가의 작품을 병치해 같은 공간 속 다른 시간을 연결한다. 임정의 작가는 오래전 호텔이 활발히 이용되던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공간의 ‘전성기 시절’을 기록했고, 최용준은 공용 로비와 남산을 감싸는 외관, 녹색 대리석·트래버틴·브론즈·오크 목재 등의 재료를 기록했다. 정지현은 2025년 철거 현장을 찾아 화려했던 공간이 무너지고 흩어지는 순간을 담았다. 익숙한 장소가 낯선 풍경으로 변모하는 장면을 통해, 사라져가는 건축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게 한다. 사진 속 공간의 빛과 질감은 시간의 흐름을 동시에 보여주며, 사라진 건축의 감각을 관람자에게 전달한다.

또한 전시는 크리스마스 자선열차, 손님들의 추억, 직원 회고 등도 함께 소개한다. 철거된 건축의 기억은 ‘증언자들’의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단순한 사라짐을 넘어 생생한 존재로 다시 살아난다.

정지현 ‘밀레니엄 힐튼 호텔 서울_로비_석재’, 2025 <사진 제공 = piknic>
정지현 ‘밀레니엄 힐튼 호텔 서울_계단’, 2025 <사진 제공 = piknic>

비 오는 날, 오래된 건축의 작별 인사

필자는 힐튼서울과 직접적 경험이 없었다. 한마디로 초면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억이 없음에도 건축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과 동일선상에 두는 시도가, 낯설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인간의 뼈 속에도 칼슘이 있고, 콘크리트 속 칼슘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생물과 광물, 인간과 건축이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전시를 관람하면서 사진 속 로비의 빛, 설치 작품 속 파편의 질감, 인터뷰에서 들려오는 손님의 목소리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공간을 간접적으로 살아보게 했다.

전시를 관람했던 날은 비가 내리렸다. 도시의 먼지를 씻어내듯 오래된 건축 하나가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전시는 단순히 사라진 건물의 기록을 넘어, 우리가 공유한 기억과 도시의 시간을 어떻게 남길 것인지를 묻는다.

©BRIQUE Magazine

 


전시명.
힐튼서울 자서전

기획.
목목문화재단, ()글린트

공동기획.
CAC (Curating Architecture Collective)‬

참여작가.
김종성, 노송희, 백윤석, 서지우, 임정의, 정지현, 최용준, 그래픽캐뷰러리, 테크캡슐‬ ‭

후원.
현대자동차

일시.
2025년 9월 25일 (목) ~ 2026년 1월 4일 (일)
10: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피크닉 (서울 중구 퇴계로6가길 30)

인스타그램.
@pikn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