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 공동체를 다시 묶다
글. 김태진 에디터 사진. 안그라픽스 자료. 언형세미나, 야마모토 리켄, 나카 토시하루, 정애향 건축가
건축은 해체된 공동체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생존과 경쟁을 우선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난 현대의 주거 환경이 공동체의 붕괴를 불러왔음을 뒤늦게 깨닫는 요즘, 우리는 집의 역할과 형태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건축가와 이론가가 함께 건축 담론을 나누는 ‘언형세미나’의 운영자인 박창현 에이라운드건축 대표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심에 두고 얼마 전 마련한 ‘공동주택의 방향과 미래’ 세미나에는 ‘2024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이자 ‘탈주택’의 저자인 야마모토 리켄 건축가와 공동 저자인 나카 토시하루, 이들의 동료인 정애향 건축가가 함께 참여했습니다.
양국 건축가들이 공동체 회복을 위한 건축의 역할을 화두로 강연과 토론을 나눴고, 참석한 150여 명이 이 주제에 함께 머리를 맞댄 현장을 전합니다.

주택, ‘교환가치’에서 ‘사용가치’로 전환
건축의 가치는 재화의 관점에서 ‘교환가치(exchange value)’와 ‘사용가치(use value)’로 나눌 수 있다. 교환가치는 건축을 화폐와 같은 재화로 전환할 수 있는 가치이며, 사용가치는 인간이 직접 삶을 영위하고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기반으로서의 가치이다. 건축은 이 두 가치 중 어느 하나를 극단적으로 선택할 수 없으며, 대신 두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며 결과물로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의 주거는 교환가치가 지나치게 강조된 형태이다. 거주자들은 집 값과 땅 값의 등락에 따라 가치를 판단하고, 주택을 삶을 ‘짓는’ 공간에서 자산 증식 수단으로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주택의 사용가치는 효율성과 배타성에 종속되었으며, 빠른 엘리베이터, 넓은 주차장, 외부인 배제 등 폐쇄적 단지 설계로 나타났다. 그 결과 주민 간 자연스러운 교류와 공동체적 관계망은 사실상 단절됐다.
앞으로의 주거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강연자들은 지금까지의 대단지 집합주택이 교환가치 극대화에 치중한 한계를 지적하며, 사용가치를 회복하는 데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는 논의를 펼쳤다. 건축은 단순히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연결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미나에서 제시된 사례들은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대규모 도시 속 공동체 회복에서부터 골목 단위의 일상적 교류, 재일교포 커뮤니티를 지키는 학교 설계까지, 건축은 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공용 공간을 주민이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설계하거나, 작은 단위의 경제와 커뮤니티를 골목 단위에서 회복하는 등의 방법이 그 예이다.
야마모토 리켄은 대규모 도시 속 공동체를 회복하는 ‘시키이’ 공간을, 나카 토시하루는 골목 단위의 작은 커뮤니티와 소호(SOHO)주택을, 정애향 건축가는 재일교포 커뮤니티와 조선학교를 통해 건축이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 이제 이들의 사례를 통해, 교환가치 중심의 주거에서 사용가치 중심의 건축으로 나아가는 구체적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키이’에서 회복하는 공동체 – 야마모토 리켄 강연
야마모토 리켄은 지난해 프리츠커상 수상자이다. 그의 수상은 프리츠커상의 선정 기준이 진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일본에서도 오래 변방의 길을 걸었던 그가 이 상을 수상함으로써 건축계의 관심이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미학적 아름다움에서, 건축과 주변 맥락의 관계, 더 나아가 건축이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강연에서 야마모토 리켄은 ‘사이(in-between)’ 공간을 통해 건축을 보다 유동적이고 상호작용적인 체계로 제시했다. 그는 한국에서 직접 설계한 ‘강남하우징’과 ‘판교하우징’ 사례를 소개하며, 이러한 ‘사이의 공간’ 실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리켄이 주목하는 핵심은 ‘시키이(閾)’라는 개념이다. 사전적으로 문지방이나 문턱을 의미하는 시키이는, 그에게 있어 집과 외부, 집과 집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중간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는 한국 전통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방과 같은 공간적 장치를 떠올리게 한다. 리켄의 시키이는 단순한 물리적 전이 공간이 아니라,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삶이 중첩되는 장場으로 정의된다.



‘강남하우징’을 직접 방문해보시면, 과거에 함께 사용되던 공용 공간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관리 공단 측에서 일관된 관리와 감독을 통해 공간을 통제해야 관리가 용이하고 거주 환경이 쾌적해진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반대합니다. 주민들이 자유롭게 공간을 활용할 때, 건축은 비로소 본래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 야마모토 리켄, ‘강남하우징’의 공용 공간을 설명하면서

특히 그는 시키이에서 발생하는 ‘경제 활동’에 주목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 활동은 단순한 자산 축적이나 교환가치 확대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사회적·실천적 교류를 의미한다. 판매자에게는 노동에 대한 실질적 보상으로, 구매자에게는 판매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적 가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한 ‘행위(action)’의 정치성과도 닮아 있으며, 경제를 자본 축적의 체계가 아닌 ‘사회적 유대(social bond)’를 형성하는 매개로 전환하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리켄의 건축은 단절된 현대 도시 구조의 문제에 대해 설계자가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그 대안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문턱·마당·툇마루와 같은 일상의 ‘작은 공간들’을 새롭게 조직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건축은 미학적 완결성보다 사회적 관계 회복을 중시하며, 궁극적으로 공간을 통한 공동체적 삶의 재구성을 지향한다.
어느 날 ‘판교하우징’ 주민들에게 감사 편지가 왔습니다. 저의 설계 덕분에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요. 저를 초대해 작은 파티를 즐기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사무소 직원과 함께 한국에서 주민들을 만나뵀습니다. 설계를 하면서 정말 기뻤던 이벤트였습니다.
– 야마모토 리켄, ‘판교하우징’ 주민들과의 일화를 설명하면서

골목에서 피어나는 작은 공동체 – 나카 토시하루 강연
야마모토 리켄이 대단지 규모의 도시 공동체 회복을 이야기했다면, 나카 토시하루는 보다 미시적인 시선으로 골목과 골목을 연결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그의 제안은 ‘SOHO주택’이다. 이 주택은 소규모 경제 활동과 커뮤니티 형성을 동시에 고려한 집합주택으로, 다섯 가구의 SOHO 유닛과 반지하 공유 오피스, 1층 식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히 주거 기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택 안에 작은 경제 단위와 사회적 교류의 무대를 함께 담아낸 구조이다.

SOHO주택의 특징은 공유 공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연결 지점에 있다. 입주민들은 공유 오피스와 식당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얼굴을 마주하고, 생활과 일이 분리되지 않은 ‘작은 마을’ 같은 관계망을 구축한다. 더 나아가 이곳의 운영 방식은 상가번영회와 유사하게 협의적이다. 거주자들은 공간 사용 방식과 책임을 논의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때로는 갈등을 협력의 동력으로 전환한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산다’는 말은 단순한 물리적 거주를 넘어 공동의 리듬을 맞추는 행위로 확장된다.



SOHO주택에서는 한 달에 한 번, 플리마켓을 열고자 하는 주민의 제안으로 매월 정기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골목 앞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경제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나카 토시하루, 주택과 커뮤니티에 관해
이 주거 실험은 오늘날 도시에서 잊혀진 ‘골목’의 감각을 되살린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교환가치의 극대화 속에서 이웃을 단절시켰다면, SOHO주택은 작은 단위의 경제와 커뮤니티를 회복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나카 토시하루의 제안은 소박하지만 현실적이다. 대단지를 새로 짓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리노베이션을 통해 작은 주택 단지 안에서 경제와 커뮤니티를 동시에 엮어내는 실험이다. 이러한 실험이 쌓이고 번져 나간다면, 도시의 골목마다 서로 다른 리듬과 이야기를 품은 작은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 결국 SOHO주택은 ‘주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주택이 살아가는 방식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답을 던진다.


재일교포의 분투와 ‘조선학교’의 의미 – 정애향 강연
행사 사흘 전, 야마모토 리켄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정애향 건축가가 게스트로 참여해 발표를 진행했다. 준비 시간이 많지 않았음에도 그는 재일교포 4세로 살아오며 겪었던 어려움과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가 처한 위치, 그리고 그 속에서 ‘조선학교’가 지니는 의미를 차분히 풀어냈다. 일본 내 조선학교는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라, 공동체의 자존심이자 삶을 지탱하는 중심축이었다.
재일교포는 1910년 일본의 한반도 병합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그 후손을 말합니다. 광복 이후 약 200만 명이었던 조선인 중 140만 명이 한반도로 귀국했으며, 현재 일본에는 약 43만 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조선학교는 재일 조선인 커뮤니티의 문화와 한국의 역사를 교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학교입니다. 학생들은 왜 일본에서 태어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며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삶을 준비합니다.
– 정애향 건축가, ‘조선학교’ 프로젝트의 맥락 속에서 갖는 재일교포의 의미

정애향 건축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조선학교 신축 과정을 소개했다.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건축비 ‘0원’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4층 규모의 낡은 콘크리트 건물을 새롭게 지어야 했지만,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을 사람들은 토지와 학교 부지를 일부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했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그는 학교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애썼다.
축소된 건축 규모에도 불구하고 교실의 층고를 높여 공간이 위축되지 않도록 했고, 복도에서도 시선이 끊기지 않도록 설계하여 위아래 층이 시각적으로 연결되도록 했다. 또한 회의실과 음악실, 미술실을 겸하는 가변적 공간을 마련하여 작은 공간의 사용가치를 최대화했다. 결과적으로 학교는 규모는 작아졌지만, 오히려 더 열리고 긴밀히 연결되는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정애향 건축가는 설계 과정뿐 아니라 학교를 둘러싼 동네의 변화와 그 속에서 건축이 담당할 역할까지 설명했다. 그가 전한 조선학교는 재일교포들이 차별적인 사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그는 건축을 통해 그들의 삶을 지키고, 커뮤니티의 미래를 열어줄 수 있다고 말하며, 그 과정에서 건축가로서의 책임과 분투가 느껴졌다.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 건축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경계 위에서 싸우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발표는 건축이 단순한 형태나 기능을 넘어,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삶과 기억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었다. 이는 건축이 공동체의 언어이자 사람들의 존엄을 지켜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한 자리였다.



조선학교를 설계하면서 저는 이 학교가 단순히 동포들을 연결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고, 일본 사회와 재일 교포를 이어주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건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학부모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 재일 교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지만, 이곳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오해가 풀리지 않을까”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재일 교포 건축가로서, 또한 야마모토 리켄 선생님의 의지를 이어가는 건축가로서 앞으로 지역과 사람을 연결하는 건축을 더 많이 만들고자 합니다.
– 정애향 건축가, 강연 마지막 메시지



작은 장치로 회복하는 공동체, 건축의 사회적 역할
이날 세미나는 오늘날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건축이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자리였다. 야마모토 리켄은 대규모 도시 속에서 공동체를 회복하는 구조를 제시했고, 나카 토시하루는 골목의 작은 리듬 속에서 커뮤니티를 발명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정애향은 타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며 건축을 통해 공동체의 존엄을 지켜내는 분투를 증언했다. 규모와 맥락은 다르지만, 세 건축가가 공통으로 지적한 바는 분명했다. 건축은 교환가치에 매몰된 시스템의 부속물이 아니라, 사용가치를 회복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조직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공동체가 해체된 시대에 건축은 다시 묻는다. ‘집이란 무엇인가, 학교란 무엇인가, 도시란 무엇인가.’ 그 답은 거대하고 완결된 형식 속에 있지 않다. 문턱과 골목, 교실의 층고처럼 작은 장치 속에서 관계를 다시 이어내는 방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건축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사회적 실천이자 정치적 언어일 수밖에 없다. 이날의 논의는 그 오래된 사실을 다시 환기시키며,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어떻게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지를 숙제로 남겼다.

행사명.
언형세미나 #25 ‘공동주택의 방향과 미래’
일자.
2025년 9월 9일 (화) 18:00 – 22:00
장소.
에피소드신촌369 (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57-50), 2층
주최.
언형세미나
공동 주관.
안그라픽스, 브리크매거진
후원.
삼익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