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묘 앞 하늘을 가린 서울의 선택
에디터. 김태진 자료. 서울특별시, 국가유산청
서울시는 누구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까
서울시는 지난 10월 30일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변경’을 고시했다. 핵심은 단순하다. 종로변 55m였던 건물 허용 높이를 98.7m로, 청계천변 71.9m였던 높이를 141.9m로 각각 완화해도 된다는 것이 골자다.
‘재정비’라는 표현은 포장에 가깝다. 실상은 ‘더 높게 지어도 된다’는 신호탄을 보낸 것이다. 서울시는 토지주들의 수익성이 보장되는 신축 건물을 지으면서도 세계유산인 ‘종묘’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재정비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세운4구역 토지주들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유산 규제로 재개발이 막히면 정부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운4구역은 종묘에서 180m 떨어져 있어 역사문화환경 보존구역(100m 이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거들었다. 전체 시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서울시가 특정 토지주와 개발업자의 논리를 대신 말한 셈이다.
도시 행정이 공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지 않고 사적 이익의 논리를 앞세우는 순간, 도시의 미래를 판단하는 기준은 기울어진다. 이대로 강행된다면 이번 결정은 ‘공적 이익’을 조율해야 하는 공공기관이 ‘사적 이익’을 대변하고 나선 사례가 될 수 밖에 없다.

도시 보존은 비용이 아니라 장기적 투자다
종묘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서울시민 모두의 자산이다. 문화유산은 도시의 정체성과 기억을 담는 그릇이며, 장기적으로 도시의 경쟁력과 브랜드를 형성한다. 유네스코UNESCO는 오래전부터 세계유산의 ‘시각적 완전성(visual integrity)’을 강조해왔다. 이는 건물의 높낮이뿐 아니라 시야권, 스케일, 주변 공기감, 도시의 리듬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실제로 세계유산을 가진 도시들은 관광 수입, 지역 활성화, 시민 만족도 등에서 높은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종묘 역시 단기적 개발 이익보다 훨씬 큰 장기적 공공 가치를 제공한다.
서울시는 “그늘이 생기지 않는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근거로 경관 훼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시 경관은 빛과 그림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종묘의 고요함, 시야의 깊이, 장소의 호흡은 수백 년간 형성된 공간의 질서다. 이 위에 140m의 건물이 들어선다면, 이는 조망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기억을 덮어버리는 일이다.
세운상가 일대의 공방, 제조 생태계, 창작자들의 관계망 또한 도시의 중요한 자산이다. 도시 재생의 핵심은 기존 생태계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기능을 덧입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계획은 ‘리노베이션(re-novation)’이 아니라 사실상 ‘리셋(re-set)’에 가깝다. 도시를 초기화한다는 명분 아래 과거의 결을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재생이 아니라 소거다.

국가유산청과 유네스코의 오래된 경고
국가유산청은 “1995년 세계유산 등재 당시부터 주변 고층 개발을 제한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유네스코 또한 지난 4월 서울시에 세계유산 영향평가(WHIA)를 요구했으나, 서울시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계획을 강행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 문서에는 종묘가 “완충지대 너머의 현대 도시화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명시돼 있다. 즉, 문제는 경계선이 아니라 ‘영향 범위’다. 도시의 맥락은 선으로 나뉘지 않는다.

쾰른, 리버풀, 드레스덴이 보여준 시사점
해외 사례는 이번 사안의 위험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독일 ‘쾰른 대성당’은 개발 압력 때문에 2004년 위험유산 목록에 올라갔다. 쾰른시는 도시의 상징적 시야를 지키기 위해 고층 개발을 오히려 낮추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관광·브랜드·시민 자부심 등 도시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영국 리버풀 해양상업도시는 개발로 인한 경관 훼손 때문에 2021년 결국 세계유산 지위를 잃었다. 독일 드레스덴 엘베 계곡도 다리 건설로 인해 유산성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지정이 취소됐다. 세계유산은 한번 잃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반면 세운4구역 토지주들이 제시한 도쿄왕궁·런던탑·구겐하임 사례는 적절한 근거가 아니다. 도쿄왕궁은 세계유산이 아니며, 런던 금융지구 고층 건물은 유산 경계에서 500m 이상 떨어져 있다. 또한 구겐하임 주변 고층 건물은 대부분 세계유산 지정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세계유산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경계 밖이라도 영향을 주면 제한한다”는 점이다.

세계유산 도시라면 영리해야 한다
세계유산을 가진 도시는 보존과 개발의 균형을 정교하게 계산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억을 이유로 정체되지 않고, 개발을 이유로 기억을 지우지 않는 태도, 그 둘 사이를 조율할 수 있는 도시야말로 진정한 ‘영리한 도시’다.
세계유산은 도시의 발목을 잡는 규제가 아니라 미래를 담보하는 자산이다. 오래된 풍경은 도시 브랜드의 핵심이 되고, 세심하게 축적된 경관은 그 어떤 도시도 복제할 수 없는 공간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세계유산 도시가 영리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 의미다. 단기적 수익의 속도를 조절해 장기적 가치의 기반을 지키는 능력, 그것이 도시의 경쟁력이다.
그렇기에 세계유산 주변의 건축은 전통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라, 전통의 감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이어야 한다.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하는 복고식 개발도, 전혀 다른 스케일로 기억을 압도하는 방식도 도시를 살리지 못한다. 세계유산 도시는 전통의 리듬을 읽고, 그 리듬에 현대적 언어를 새롭게 결합해야 한다.
종묘가 품은 고요함과 질서, 장소성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도시는 전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높이가 아니라 방식이다. 세계유산 도시에서 건축가와 행정이 해야 할 일은 ‘더 크게 짓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더 영리하게 짓는 것’이다.
서울은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도시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 서울은 비로소 세계유산 도시로서의 품격을 갖추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