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크brique> 디지털 멤버십 정기구독
공간이 아닌 관계를 채우다

공간이 아닌 관계를 채우다

김세훈 교수남부시장도시설계스튜디오도시재생서울대 환경대학원선미촌전정환전주 원도심정수경즐거운도시연구소크립톤Interview
글 & 자료 정리. 양지슬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설계학과 석사과정 기획 & 편집. 정지연 브리크 편집장 취재 협조.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설계학과 도시재생스튜디오, 즐거운도시연구소, 크립톤 전북지사

 

[전주 원도심을 가다] 도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행정, 교육, 의료, 상업 등 주요 기능이 밀집된 사회적 인프라이다. 그러나 이 도시도 사람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로병사’를 겪게 된다. 도시의 시발점으로 기능의 중심이 됐던 원도심은 더더욱 부침이 심하다. 한국전쟁 이후 빠르게 산업화, 고밀도화를 거쳐 성장한 우리나라 도시들이 인구 감소, 상권 변화 등으로 원도심을 중심으로 쇠퇴가 시작됐다.

전주는 조선의 뿌리이자 호남지역의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 다양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도시이다. 한옥마을, 판소리, 국제영화제 등 굵직한 콘텐츠들로 지역 중소도시로서는 남다른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 전주도 최근 원도심을 중심으로 빠르게 유휴화되고 있다. 무엇이 사람을 떠나게 했을까? 다른 무언가로 빈자리를 다시 채울 수는 없을까? 쇠퇴는 정말 나쁜 것일까?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설계학과 도시재생스튜디오 김세훈교수와 학생들은 이같은 질문들을 중심으로 지난 1학기 전주 원도심의 현재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회공헌형 교과목(service-learning)’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서 학생들이 던진 질문과 제안들이 전환기를 겪고 있는 지역 원도심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주고 있어 그 과정과 결과물을 정리해 소개한다.

 

글 싣는 순서.
① 지역 재생, 쇠퇴와 채움 사이 – 전주 덕후가 쏘아 올린 작은 공
② 전주를 되살리는 여덟 가지 방법 – 학생들의 시선으로 본 전주의 가능성
③ 공간이 아닌 관계를 채우다 – 김세훈 교수가 말하는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도시재생사업을 바라보는 견해는 어느 지역에서나 상당히 엇갈린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동네를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애정과 창의성을 끌어내자는 기대가 한 축을 이룬다면, 다른 한 축은 똑같은 내용으로 보여주기식 이벤트, 예산만 낭비한다는 비판이다. 도시를 공부하고 삶의 공간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필자로서는 아쉬운 지점이다.

전주 원도심에는 도시재생 과정을 겪은 대표적인 두 공간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상거래가 이뤄진 남부시장과 성매매 업소가 밀집했던 선미촌이다. 두 곳은 쇠퇴 과정에서 재생사업을 통해 활성화되었으나, 다시 그 효과가 떨어지면서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남부시장은 청년몰을 조성해 일시적인 효과를 거뒀지만 기존 상권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유통구조의 변화에 입점 매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선미촌은 문화적 재생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지만 예산 지원이 끊어지자 공간을 지키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이처럼 많은 이들의 노력이 응축된 도시재생 사업지들이 지속가능성 문제에 부딪히면서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박정원 도시계획기술사무소 대표는 “공공이 주도해 하향식으로 진행되는 도시재생사업의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선미촌은 단체장 교체 이후 추진 동력이 약화되고 지구단위계획에 기반한 개발사업으로 전환될 위기”라며 “지역자원을 보존하며 민간이 중심이 되는 상향식 도시계획이 접목돼야한다”고 말했다.

도시재생을 어떻게 해야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 공공의 재정적 지원 없이도 지속가능한 방법은 없을까?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한 김세훈 교수는 “도시재생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사회적·문화적 감각의 복합적 실천”이라며 “그 중심에는 항상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있다”고 말했다.

종강 후 김세훈 교수와 별도의 인터뷰를 통해 전주 원도심의 미래와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방법론에 대해 물었다.

 

‘순환하는 선미마을’ 팀이 교수진으로부터 크리틱을 받고 있다. <사진=도시재생스튜디오>
‘리부팅 남부’ 팀이 계획안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도시재생스튜디오>

 

 

채움보다 관계 맺음이 만드는 전주의 미래
– 김세훈 교수 인터뷰

 

전주는 현재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도심 곳곳에 걸린 임대광고는 위기감이 느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상권활성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기대감이 부풀고 있는 듯합니다.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바로 그 역설적인 모습이 오늘날 지방 원도심이 마주한 현실이자, 새로운 가능성의 출발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인구감소’나 ‘쇠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인상을 받지만, 저는 ‘도시의 전환기’라고 봅니다. 미국 도시설계학회장을 역임한 앤 버네즈 머튼Anne Vernez Moudon 교수가 역설했듯, 인구 감소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과밀했던 공간이 여유가 생기는 디크라우딩(de-crowding)일 때도 있거든요. 이로 인해 비싼 임대료에 밀려났던 새로운 시도들이 들어올 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전주의 원도심은 끈이 풀린 것처럼 인구가 감소하고 활력이 급강하하는 전형적인 수축도시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팀 타운센드Tim Townshend가 말한 ‘보이지 않는 수축’에 가깝죠. 사람과 문화콘텐츠는 풍부한데, 상업 활력이 빠져나가면서 중심이 비어가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인구감소를 막을까’가 아니라, ‘이 전환기를 어떻게 기회로 만들까?’가 되어야 합니다.

 

관점을 바꾸는 게 먼저군요. 전주시는 지난 20년간 한옥마을, 전라감영 복원 등 하드웨어 구축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거점들이 섬처럼 흩어져 있다는 지적이 많아요.

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도시 연결자(Urban Connector)’적인 접근입니다. 이는 단순히 길을 내고 건물을 잇는 물리적 연결을 넘어섭니다. 한옥마을의 역사, 남부시장의 서민적 활기, 영화의 거리의 현대적 감성, 객리단길의 자생적 에너지, 그리고 복원된 전라감영이라는 구심점을 하나의 경험과 이야기로 엮어내는 연결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전주 원도심은 구슬은 많은데 꿰어줄 실이 부족한 형국입니다. 방문객들은 한옥마을이나 객리단길의 한 지점과 같은 ‘점’을 목적지로 찾아올 뿐, 그 점들을 이으며 원도심 전체를 선과 면으로 즐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할 방법 중 하나는 ‘장소 패치워크(Place Patchwork)’입니다. 모든 곳을 똑같이 보존하거나 하나의 사업으로 개발하는 게 아니라, 각 장소의 개성을 살리고 특수성을 고려해 조각보처럼 깁는 방식입니다.
가령 이번 수업에서 ‘Plotting 전주’ 팀이 제안한 것처럼, 전주의 전통 자산인 한지와 영화 산업을 연계해 ‘한지 영화출판촌’을 만드는 것은 1, 2, 3차 산업을 한곳에 모으는 흥미로운 시도입니다. 또한 ‘전북맛.zip’ 팀의 아이디어처럼 전북의 다양한 음식을 체험하고 소비자와 판매자가 만나는 단기 컨벤션을 열거나, ‘Food-tech in Life’ 팀처럼 푸드테크 기반의 복합공간을 조성하는 것도 원도심의 유휴 공간을 새로운 콘텐츠로 채우는 좋은 방법입니다.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만큼, 그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도 중요할 텐데요.

물론입니다. 그게 바로 ‘사회적 인큐베이터(Social Incubator)’에 대한 관심입니다. 전정환 크립톤 부대표가 강조했듯, 중요한 건 결국 사람입니다. 전주에는 지역의 가치를 재해석하는 로컬크리에이터, 즉 콘텐츠 덕후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하고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급선무입니다. ‘Re;Learn City Jeonju’ 팀은 전라감영을 거점으로 시민들이 직접 배우고 실천하며 상권을 살리는 선순환 구조를 제안했습니다. 건물을 짓기보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을 조직화하는 것이 훨씬 지속가능한 투자입니다.

 

사람을 키우자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오랜 딜레마와 마주하게 됩니다. 장소를 살리면서 사람도 지키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방법이 있을까요?

중요한 얘기입니다. 저는 브렌트 라이언Brent Ryan 교수가 언급한 ‘사회적 어바니즘(Social Urbanism)’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재생의 과정과 결과가 지역 구성원에게 실질적 혜택으로 돌아가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부에서부터 공동체와 자립의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와 함께 건물주들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지역 생태계의 중요한 구성원임을 인지시키고, 장기적인 상생 모델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순환하는 선미마을’ 팀은 문화예술 재생이 외부 지원금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산업과 연계해 경제적 자립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RE:TRO-SPECT’ 팀은 노후 주거지에 ‘마당’ 같은 공유 공간을 되살려 세대 간 교류를 회복하는 해법을 제안했죠. 이처럼 내부에서부터 공동체와 자립의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와 함께 건물주들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지역 생태계의 중요한 구성원임을 인지시키고, 장기적인 상생 모델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김세훈 교수가 팀별 발표에서 학생들의 계획안에 대해 크리틱을 하고 있다. <사진=도시재생스튜디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전주 원도심 활성화의 첫걸음은 무엇인가요?

거대한 청사진 선언보다 유연한 실험이 우선입니다. ‘영화산업 수도’를 예로 들면, 대규모 단지부터 짓기보다 소규모 스튜디오와 지역 내 빈상가를 활용해 저예산 영화를 만드는 경험을 쌓는 거죠. 지역 대학에서 영화나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들이 졸업 후 전주에 남아 영화나 웹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도 방법입니다. 나아가 음향이나 분장, 특수효과 같은 고부가가치 분야의 내실을 다져 특화된 인재가 모이게 만드는 것, 이처럼 작지만 단단한 성공을 계단처럼 쌓아가는 것이 원도심 재생의 첫걸음입니다. 그 다음은 느슨하게 연결하기입니다.

 

‘느슨한 연결’이라니, 조금은 막연하게 들리기도 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로 연결하되 그 힘으로 공간의 분위기와 경험 감각을 바꿔 나가는 것입니다. ‘River Stay’ 팀이 제안했듯, 단절된 전주천을 중심으로 주거, 상업, 문화를 엮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하천변을 따라 걷고, 머물고, 나누는 활동들이 자연스럽게 한옥마을과 객리단길을 잇는 실핏줄이 될 수 있죠. 이처럼 물리적인 길을 닦기 전에, 사람들의 발길과 이야기가 먼저 길을 내게 하는 방식입니다.

 

길을 내기 전에 이야기가 먼저 흐르게 한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결국 그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역할이겠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제안은 ‘덕후들을 무대 중심으로’입니다. 전주의 진짜 자산은 한옥이나 비빔밥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선보이고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판을 깔아줘야 합니다.

 

덕후들이 주인공이 된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요?

예를 들어 ‘RE : BOOTING NAMBU’ 팀의 제안처럼, 멈춰버린 남부시장에 새로운 큐레이션 콘텐츠와 체험형 소비를 도입해 다시 사람들을 모으는 겁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상인과 창작자들이 모여드는 지속가능한 장(場)으로 재부팅하는 것이죠.

 

영화의 거리처럼 이미 있는 공간도 마찬가지겠네요.

물론이죠. 영화제 기간에만 반짝할 게 아니라, 평소에도 독립영화 상영회나 감독과의 대화가 열리는 ‘커뮤니티 시네마’로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영화는 정말 콘텐츠 관련 종합 예술입니다. 연출, 촬영, 연기, 소품 제작, 시나리오 작성 등 각종 부문의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의 작업을 선보이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건물주나 행정에서는 어떻게든 빈공간을 채우려할 텐데요. ‘비어 있음’이 실패가 아닌 가능성으로 바라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그 관점의 전환이 세 번째 제안, ‘비어 있음을 허용하기’입니다. 모든 공간이 꽉 채워져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텅 빈 공간이 그 자체로 도시의 숨통을 틔워주고, 예측 불가능한 다음 활동을 위한 캔버스가 되어줍니다. 낡고 비어가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을 믿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작은 성공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이 전주 원도심의 미래를 가장 현명하게 그리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김세훈 교수와 학생들이 종강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도시재생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