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관 곁에는 늘 정원이 있었다
글 & 사진. 최성우 에디터. 김태진
[이베리아반도 유랑기] 오래전부터 막연히 가보고 싶었던 포르투와 알함브라. 두 도시를 지도에 핀으로 찍고 출발한 여행, 단 하나의 숙소만 예약한 채 아무런 정보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여행보다 ‘유랑’에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다시 지중해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며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남프랑스의 25개 도시와 지역을 64일 동안 거닐며 기록한 유랑일지입니다.
글 싣는 순서.
① 포르투, 무엇으로부터 매력을 느꼈는가 – 포르투에서 만난 장면들
② 유럽의 땅끝에 가다 – 호카곶과 사그레스 요새
③ 60년의 여정, 건축은 멈추지 않는다 – 레사 조수 풀장 Piscina das Marés
④ 시민에게 사랑받는 축구 클럽과 채석장 위에 세워진 경기장 – 브라가 시립 경기장 Estádio Municipal de Braga
⑤ 미술관 곁에는 늘 정원이 있었다 – 세할브스Serralves, 굴벤키안Gulbenkian, 파울라 헤구Paula Rego 미술관
들어가며 – 미술관 곁에는 늘 정원이 있었다?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겨 눈치채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참 많다. 어느 날, 리스본의 칼루스트 굴벤키안 미술관(Museu Calouste Gulbenkian) 정원 벤치에 앉아, 잔디밭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무심결에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차를 끌고 나란히 들어오는 사람들, 잔디 위에 드러누운 사람, 아름드리나무의 그늘에 책을 읽는 이들.
미술관을 나와 정원에 들어서며 방금 본 작품들을 떠올렸다. 관람은 전시실을 나온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만약 입장 전 정원을 거쳐야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필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관 곁에는 언제부터 정원이 있었을까? 왜 필요했을까? 이번 글은 바로 ‘미술관 옆 정원’에 관한 이야기다. 미술관이라 불리는 공간이 시작된 순간부터, 역사적 맥락을 살짝 짚어보고, 포르투갈에서 만난 미술관의 정원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미술관의 기원과 정원의 탄생 – 미술관 곁에는 언제나 정원이 있었다!
미술관은 왕실과 귀족들의 매우 사적인 수집 공간에서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15~16세기), 희귀한 동물 표본, 광물, 고대 유물과 예술품을 저택 안에 전시장을 마련한 것으로, 일명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 Wunderkamme)’이라 불렸다.
공공 미술관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프랑스 혁명 이후 왕실의 수집품이 시민에게 개방되면서 1793년 개관한 파리의 루브르Louvre였다. 튀일리 궁전 일부와 정원이 미술관이 된 루브르처럼 19세기 사이에 등장했던 공공 미술관은 본래 궁전이었던 곳이 많아 정원이나 공원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비슷한 시기 설립된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1819년 설립)과 17세기 초 왕실 별궁의 정원으로 만들어진 레티로 공원은 직접적인 관계로 보기 어렵지만, 도시적 연속성과 방문객의 동선 덕분에 루브르와 튀일리처럼 ‘미술관과 정원’의 관계로 보는 의견이 있다.



미술관의 정체성이 예술 교육, 시민 교양, 국가 정체성 형성을 아우르며 확립된 것은 19세기 영국 런던의 내셔널갤러리(1824년 설립)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1819년 설립)부터다. 현대미술 전문 기관으로의 모델을 확립한 것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MoMA(1929년 설립)이다. 정원이 전시 프로그램의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도 MoMA 조각공원이다. 노르웨이 오슬로 비겔란 조각공원, 파리 로댕 미술관 조각공원이 녹지 공원이자 본격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 대표적 예다.
미술관의 정체성이 예술 교육, 이후 미국 포트워스의 킴벨 미술관(1972년 개관),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1977년 개관), 덴마크 코펜하겐의 루이지애나 미술관(1958년 개관, 1990년대 확장), 시카고 미술관과 밀레니엄 파크(2009년 개관) 등에서 정원은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정원은 자연 요소를 통한 생태적인 가치, 작품 감상 후 긴장을 풀어주는 휴식처, 야외 전시 공간의 확장이자 커뮤니티와 미술관을 잇는 매개 공간이 되었다.


유랑 기간 중 방문한 포르투갈 미술관과 정원
포르투갈에서 방문한 세 곳의 미술관–포르투의 세할브스 미술관(Serralves Museum), 리스본의 굴벤키안 미술관(Calouste Gulbenkian Museum), 카스카이스의 파울라 헤구 미술관(Casa das Histórias Paula Rego)–은 각기 다른 시대와 맥락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원을 통해 예술과 일상을 이어주고 있었다.
광활한 18헥타르(ha)에 달하는 광대한 공원 속에 스며든 세할브스, 도심 한가운데 7.5헥타르(ha) 규모로 시민들의 일상과 맞닿은 굴벤키안, 소나무 숲과 붉은 건축물이 대비되는 파울라 헤구 미술관은 모두 방문객의 일상을 예술적 경험으로 바꿔 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관찰하고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나와 비교해, 이곳을 일상에서 누리는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곳은 공원이다 – 세할브스 미술관 공원(Serralves Park)
세할브스 미술관의 정원은 ‘공원’이라 명명된다. 총 18헥타르(ha)에 달하는 면적을 듣기 전, 지도 속의 미술관 건물 크기를 본 순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공원은 아니었다. 1923년 비젤라 2대 백작 카를루스 알베르투 카브랄CArlos Alberto Cabral이 집안의 여름 별장 킨타 두 로르델루Quinta do Lordelo 영지를 상속받으며 시작되었다. 프랑스 조경가 자크 그레베르Jacques Gréber가 1932년 프랑스식 정형 정원과 영국식 풍경 정원을 혼합해 설계했다. 추가로 농지와 관개 구조를 확보하며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이는 20세기 개인 조경 프로젝트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에 ‘핑크빌라’라는 애칭으로 불린 빌라 데 세할브스Villa de Serralves도 건립되었다.

1950년대 매각 이후 방치되다가 1986년 포르투갈 정부가 매입해 포르투 시, 개인 후원자와 함께 재단을 설립, 복원 및 고도화 과정을 거쳐 사립 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공원은 포르투 시민을 포함해 모든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있다. 다만, 매년 6월초 진행되는 축제(Serralves em Festa), 5월 18일 국제 박물관의 날 등에 한해 무료로 개방된다.
공원 곳곳에는 알바루 시자Alvaro Siza가 설계한 현대미술관, 하우스 오브 시네마House of Cinema, 가드너스 하우스Gardener’s House와 조제 마르케스 다 실바José Marques da Silva가 설계한 빌라 데 세할브스 등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전시실에서 공원을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 특별한데, 전시실 사이를 지나는 통로마다 큰 창을 두어 차경을 선사하고, 유리창 너머 조각 작품들이 마치 인사하듯 설치되어 있다.
세할브스 공원은 8000여 본과 23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의 종류만큼 자연을 경험하기 풍부한 장소다. 1987년 대중에 개방된 이래로 지속적으로 조경 유산을 보존하고 잘 가꾸기 위해 2001년부터 공원 복원 프로젝트 철학을 ‘재활(Rehabilitation)’로 선언하며 실천해 왔다. 2019년 설치된 ‘트리탑 워크웨이(Treetop Walkway, 2019)’는 숲 위를 걷는 경험을 제공한다. 놀이와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되며, 방문객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는 자연을 체험할 수 있다.




도심 속 오아시스, 쉼터 – 굴벤키안 미술관 정원(Gulbenkian Garden)
굴벤키안 미술관은 리스본 아베니다스 노바스Avenidas Novas 지구에 있다. ‘새로운 대로들’이라는 뜻의 이름 그대로, 직선적으로 구획된 블록과 넓은 가로가 특징이다. 중산층 이상이 사는 주거지이자 금융, 병원, 대학 등이 집중된 생활·업무지구로, 관광객이 머무는 벨렘Belem이나 바이샤Baixa 지구와 달리 리스본 시민의 일상을 보여주는 곳이다. 굴벤키안 미술관을 찾게 된 이유는 쿠마 겐고가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진행한 현대미술센터(CAM, Centro de Arte Moderna) 방문하기 위해서였지만, 아쉽게도 공사 중이었다. 이에 실망한 나를 위로해 준 곳이 바로 정원이었다.

도심 속 7.5헥타르(ha)의 부지 안에는 굴벤키안 재단 본사, 미술관, 현대미술센터가 있으며, 두 개의 인공호수, 야외극장, 오솔길, 다리 등이 정원을 채웠다. 1960년대 조경 건축가 안토니우 비아나 바레투António Viana Barreto와 곤살루 히베이루 텔레스Gonçalo Ribeiro Telles가 설계한 이 정원은 포르투갈 조경 건축의 상징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섬세한 기하학을 기반으로 평화와 공간감을 부여한 산책로와 인공으로 만들어낸 자연이 시간이 지나며 시민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최근 현대미술센터 리모델링 준공과 함께 블라디미르 주로비치Vladimir Djurovic의 설계로 남쪽 정원이 확장되었다.








소나무 숲과 붉은 기둥 – 파울라 헤구 미술관 정원(Casa das Historias Paula Rego)
리스본에서 기차로 40분 거리, 바닷가 도시 카스카이스에서 만난 이 미술관은 건축가 에두아르두 소우토 데 모우라Eduardo Souto de Moura의 독특한 건축물과 예술가 파울라 헤구Paula Rego의 세계가 결합된 공간이다. 미술관의 이름부터 독특하다. ‘뮤지엄Museum’ 대신 ‘이야기의 집(Casa das Histórias)’이라 한 것은 파울라 헤구가 작품을 통해 내러티브(Narrative, 서사)를 풀어내는 방식을 반영했다.

정원은 1,000㎡ 남짓 되는 규모로, 앞선 두 미술관의 정원은 헥타르 단위 규모와 달리 아담하다. 본래 담장으로 둘러싸인 소나무, 유칼립투스 숲이었고, 현재 미술관 건물이 들어선 자리는 20세기 초 상류층을 위한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바로 옆 해양박물관 건물이 있는 자리는 테니스클럽 본관 건물이었다. 흥미롭게도 두 기관은 필지가 나뉘어 있지만 담장이 없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클럽이 없어진 1974년 이후 유휴지로 남았다가 2009년 미술관이 세워졌다. 건축가는 기존 나무들을 최대한 보존하며 텅 빈 테니스코트 자리에 건축물을 끼워 넣듯 배치했다. 그래서 정원은 원래 자리했던 자연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미술관 내부에서부터 정원을 적극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세할브스에서처럼 전시실 가운데 창을 두었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화이트큐브의 진동 상태에서 작품에 집중했다가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며 릴렉스하는 등 강약을 조절해 주는 경험하게 하고, 실내외의 경계를 허물어 ‘이야기의 집’이 자연으로 이어지는 연속된 공간임을 느끼도록 한다. 카페테라스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소나무 그늘에서 독서하는 사람,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 모두의 일상은 미술관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나오며 – 정원이 있는 미술관
미술관에서의 여정은 전시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정원 속 자연으로 시선을 두며 거닐고, 작품의 여운을 만끽하고, 때로는 입체적인 야외 조각과 마주하기도 한다. 긴장과 완화를 오가며 감각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세할브스에서는 광활한 공원에서 숲속과 정형 정원, 건축물을 넘나들며, 굴벤키안에서는 일상을 보내다가 한 템포 쉬어가며, 파울라 헤구 미술관에서는 나무 그늘에서 각기 다른 경험을 했다.
세 곳의 공통점은 나무와 숲, 즉 ‘자연’이었다. 미술관은 언제나 정원(자연) 안에 있었다. 도시적 맥락과 전시 작품 등은 달랐지만, 크든 작든 초록이 주는 에너지는 강렬했다. 세할브스는 축제와 교육으로 도시 속 문화공원, 굴벤키안은 명백한 일상 속 휴식공간, 파울라 헤구는 평안함을 통해 감각을 열어 주었다.
미술관 옆 정원은 도시적·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기후 위기 시대의 정원은 도심 속 녹지로서 생태적 가치를 제공하고, 커뮤니티의 문화 활동과 참여를 촉진한다. 미술관은 정원을 통해 닫힌 전시장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와 연결되는 열린 복합 공간으로 변모한다.
정원이 있는 미술관에서 바람과 나무, 작품의 여운을 함께 음미해 보자. 그 순간 작품·자연·도시·자신이 교차하며 미술관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으로 남는다. 미술관 곁에는 언제나 정원이 있었다. 그것은 예술과 삶을 이어주는 미술관의 열쇠이다.

최성우 Sungwoo Choi
거닐고 쓰는 사람. 공간, 커뮤니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고 잇는 기획자이자 에디터. 브리크매거진, 한칸, 033강릉, 콘텐츠가 리드하는 도시 등에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