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글 & 사진. 최영금 에디터. 김태진
[불일치한 순환: 충북 건축자산을 찾아서] 2024년 10월, 충청북도의 건축자산을 다루는 보고서를 작성하며 충북의 11개 시군구 속 비지정 문화유산을 마주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각 지형 속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의 흐름과 흔적을 통한 건축물의 첫모습을 그려내는 시간은 건축물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읽어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건물들은 모두 필요에 의해 생산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묵묵히 소멸을 기다리는 듯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건물의 소명은 무엇일까요. 한때는 용도에 맞는 ‘무엇’으로 불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용자에 의해 용도가 변모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용자를 찾지 못한 건축물은 유휴공간이라는 이름표가 달리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연재는 ‘지속성’이라는 익숙한 단어에 빈틈을 불어넣은 ‘순환’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용도로 이용되지만 오랜 기간 건물의 연속성을 지닌 충북 내 건축자산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건물의 탄생 소명과 2025년 현재 변경된 용도로 운영되거나 멸실을 준비하는 충북의 오래된 건축물의 순환을 꿈꾸는 이야기를 풀어내려 합니다. 건물의 소유주와 사용자, 혹은 어렴풋이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덧입혀 지역 속에서 기억되어 순환되는 건축물의 순간들을 담아보겠습니다.
연재되는 건축자산이 누군가에게는 처음 본 것일 수도, 익숙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모두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아도 건축물은 그곳에 남아 사용자의 기억을 순환시킵니다.
글 싣는 순서.
① 잊혀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 충북잠업진흥회, 청주문구사 이야기
② 콘크리트 걸작 – 50년 후 열린, ‘당산 생각의 벙커’
③ 익숙하던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는 – 1970년대 청주 최초 주상복합 아파트
④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울퉁불퉁 다채로운 공간 – 청주 중앙시장
⑤ 의료 건축과 시간의 공존, 90년이 담긴 공간 – 근대 민간의원 ‘영동 제일의원’
⑥ OO소멸 시대, 학교의 두 번째 삶 – 보은군 폐교 ‘탄부초 사직분교장’
⑦ 우륵이 연주하던 탄금대에 자리한 콘크리트 처마 – ‘충주문화원’

충북의 지역경제를 책임졌던 산업, 잠업
프랑스식 단독주택 형태를 띤 충북 어느 지역의 대제산업사의 잠실공간 기사를 접했을 때만 해도 ‘잠업’이라는 업종이 낯설었다. 잠(蠶)+업은 잠사라는 행위를 업종 분류로 넣어 일컫는 말이다. 잠사는 뽕나무를 재배해 누에를 치고 명주실을 얻는 일을 말한다.
지역마다 고유의 지역사회를 먹여 살리는 산업이 존재한다. 충북은 내륙도시다. 어렴풋이 충청도라고 하면 떠오르는 업종은 농수산물이지만, 충북의 11개 시군에 대한 건축자산 목록을 훑어보며 11개 지자체마다 1개소씩 잠업이라는 이름을 띤 공간들이 보인다.
건축자산은 지역 공간 속에서 오랜 기간 자리 잡은 건물의 흔적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역사는 기록된 것 중에서 살아남은 기억이다. 다만 살아남았지만 침잠되어 있는 기억들이 산재해 다시 건져 올리는 행위처럼, 지역 공간사의 흐름을 읽다 보면 건축물을 넘어 공간들이 집합된 관계상을 읽어볼 수 있기도 하다.


1970년대를 꽃피웠던 섬유산업의 흔적
오래전 충북잠업진흥회가 사용하던 건축물은 현재 ‘폴앤주비’라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이 건물은 구(舊) 청주역과 구 조선운송주식회사 건물이었던 곳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의 사용승인은 1931년에 났으며, 카페는 당시 건물의 저장창고와 숙직실을 개조해 운영 중이다.
폴앤주비는 충북잠업진흥회 소유의 공간을 임대해 운영하고 있다. 동네 주민이었던 카페 운영자는 10여 년 전 시내에 방치된 공장 형태를 눈여겨보고 충북잠업진흥회에 문을 두드려 방치된 공간을 운영해 보겠노라 협의를 시도했다고 한다. 당시 충북잠업진흥회는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 중이어서 공간에 대한 활용에 모든 조합원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건축구조는 연와조와 목조, 철근콘크리트가 혼합된 양식이다. 이곳은 전형적인 목구조 트러스가 인상적인 곳으로, 외관은 구 조선운송주식회사의 1920년대 당시 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누에씨의 저장 창고로 쓰였던 이곳은 천장에 환풍을 위한 작은 환기창과 높은 천정고를 갖추고 있었다. 벽돌의 상태가 양호해 리모델링 당시 벽돌을 세척하거나 재치장한 줄 알았으나, 벽재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현 카페 운영자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누에씨를 보관하는 보냉 박스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현재는 당시 흔적이었던 일부 박스를 카페 내 곳곳에 소량 배치해 이 장소의 초기 용도와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카페는 충북잠업진흥회 시설 중 저장창고와 숙직실 2개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도로와 접한 누에씨 저장창고가 주요 공간이고, 카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측 편으로 숙직실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장 창고에서 숙직실 간 공간을 연결하기 위해 벽면에 개구부를 냈는데, 당시 리모델링을 할 때 벽에서 벼를 발견했다고 한다. 단열재 역할로 볏짚을 사용했고, 개구부를 내는 공사 과정에서 오래된 볏짚과 벼들이 우수수 흘러나와 다소 낯설었다는 이야기를 더해 주었다.


조금 더 구체적인 공간 역사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1970~80년대까지 양잠 창고로 사용된 당시 사진이나 도면 기록이 있을까 사단법인 대한잠사회에 전화를 걸어 충북잠업진흥회가 운영하던 잠사냉장창고 운영 당시의 모습을 요청했다. 하지만 도면과 사진은 너무 오래되어 소실되었다는 답변을 받게 되었다.
카페 운영자와 간략한 인터뷰를 통해 충북잠업진흥회 조합원들과 소통은 초창기 조합원의 2세들을 통해 공간 리모델링을 추진했고, 초창기 멤버 어르신들에게 자료 요청과 협조는 꽤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듣게 되었다. 카페 바로 옆이 충북잠업진흥회의 홍보관과 사무실이 있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정기적으로 오진 않지만, 조합원 몇몇 분이 꾸준히 오신다는 이야기도 듣게 됐다.


또다른 흔적, 청주문구사
이곳을 방문하기 전, 한 블록 떨어진 곳에 구 조선운송회사였던 현재 청주문구사로 운영되는 곳을 들렀다. 구 청주역 바로 앞에 위치해 외관적으로 근대 건축 흔적을 담아내고 있지만, 내부는 축적된 시간을 체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 모습만 존재해 있다. 드높은 층고는 보이지 않고 천장의 높이를 제한한 화이트 톤의 텍스 마감과 페인트 벽칠이 문구류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현재 청주문구사는 소유자의 2세가 운영하고 있었다. 해당 건물이 구 조선운송회사였는지 질문했지만, 잘 모른다는 답변과 그것을 왜 묻는지 의뭉스러운 눈길만 받았다. 더 묻지 않고 수첩 하나만 사 들고 나왔다.


건축자산은 건축물 소유자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지속될 수 있는 정책이다. 건축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지만, 건축물 소유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가치는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사라질 수 있다.
이곳에는 분명히 구 조선운송회사나 잠업 사무실로 운영되며 청주시 일대 지역경제의 일부였던 곳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이 외관상으로만 남아있지만, 이곳이 왜 이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런 형태를 띠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건물들이 존재하기도 하고, 내일 철거해도 아무렇지 않을 무(無)의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들도 존재한다. 어쩌면 10여 년 전 이곳에서 나고 자란 어느 청년이 이 건물에 관심을 두고 활용해 보겠노라 문을 두드린 것이 충북잠업진흥회의 세월과 기록을 모두에게 알리게 된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주택 이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건축물은 존재한다. 여전히 존재하지만 잊혔던 지역 공간 속 건축물들을 두드려, 이곳을 이용했던 사람들에게 이곳이 얼마나 활력 넘치던 곳이었는지를 환기해 주는 것이 건축자산 발굴이라는 정책이 갖는 긍정적 기여가 아닐까.
최영금 Youngkeum Choi
최영금 필자는 친환경 건축인증 업무로 건축실무로 시작해 서울의 도시재생 현장과 경복궁 서측 일대 건축자산 활성화 연구, 2022 광화문광장 백서 업무를 각각 담당했다. 독립연구로 도서관을 기반으로 지역 기록물 연구, 구술기록 인터뷰, 영상 제작 등을 통해 동네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활동을 하며 ‘동네를 보관하는 도서관’을 독립 출판했다. 이 활동을 인연으로 은평구의 ‘서울혁신파크의 기억’ 등의 기록 활동에 집필 저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는 멸실 예정인 비지정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볕터건축사사무소에서 충북 건축자산진흥 시행계획을 비롯해 지속가능한 도시공간 정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