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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바이브, 낡은 골목의 기억을 설계하다

송정 바이브, 낡은 골목의 기억을 설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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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익현 CIID 대표 에디터. 김태진

 

송정동, 아픈 기억의 풍경을 읽다

서울 성동구 송정동은 오랜 시간 말 없이 기억을 눌러 담아온 동네이다. 성수동 공업지역의 배후 주거지로 기능하며 저소득 공장 노동자들이 중랑천변에 무허가로 모여 살던 곳이었다. 장마철마다 중랑천이 범람했고 주택은 반복적으로 침수됐다. 난개발과 불법 건축은 도로 체계를 흐트러뜨렸고 지금도 차량 통행이 쉽지 않은 골목이 남아 있다.

네 개의 프로젝트가 모여있는 송정동 일대 <이미지 제공 = CIID>

 

최근 성수동의 거대 자본이 이 낮은 골목까지 밀려들기 시작했다. 건축사사무소 CIID를 이끌고 있는 주익현 건축가는 이 변곡점 위에서 흥미로운 기회를 얻었다. 같은 블록 안에서 네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게 된 것. 그는 새것을 세우는 대신 송정동의 기형적인 계단과 좁은 복도, 무창의 담벽과 방범창살을 건축의 언어로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송정 바이브’다.

<이미지 제공 = CIID>

[흔적] 시간을 지우지 않는 법: 블러드 블록Blurred Block

위치 송정벚꽃길 인접 | 용도 근린생활시설 | 핵심 기존 흔적을 남기는 보존적 증축

블러드 블록은 상습 침수의 기억을 품은 장소에 자리했다. 반복된 침수 끝에 제방이 쌓였고 강의 풍경은 산책로로 바뀌었다. 산책로를 통해 시선이 유입되자 주거보다 사무실이 어울리는 장소가 좋겠다고 판단했다. 용도 변경과 증축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Jihun Bae
수직 증축 과정에서도 기존 벽돌 벽체의 흔적을 존치했다. 전면 유리는 ‘보이는 수장고’처럼 작동하며 송정벚꽃길을 걷는 이들에게 송정동의 시간층을 어스름하게 드러낸다. ©Jihun Bae

이 건물은 근생으로서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렇기에 단순한 새것의 대비로 차별화하는 방식은 피했다. 대신 기존 벽돌조 건축의 흔적을 남겼다. 벽을 덜 허물었고 계단이 있던 자리를 기록처럼 보존했다. 새로 만든 벽체와 기존 벽체의 경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문화재를 다루듯 시간을 다뤘다.

전면 통창은 임대 건축물의 현실을 따른다. 동시에 ‘보이는 수장고’처럼 작동하게 했다. 산책하는 사람은 유리 너머로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 장면을 마주한다. 유리에 비친 나무와 하늘은 경계를 흐린다. 저녁이 되면 조명이 켜지고 기존 벽체의 흔적은 그림자로 남는다. 현재가 과거를 감싸는 장면이 완성된다. 내부 역시 흔적을 존치했다. 다가구주택의 벽체 질감을 그대로 남기고 최소한의 백색 도장만 했다. 이 건물은 과거를 지우지 않고 시간을 흐리게 겹쳐 놓았다.

©Jihun Bae
©Jihun Bae
기존 다가구주택의 벽돌 흔적을 남긴 입면. 개발의 논리로 과거를 덮기보다, 송정동의 시간을 건축의 표면 위에 기록했다. ©Jihun Bae

[길] 제멋대로 자라난 계단의 품격: 피노 몬타노(Pino Montano)

위치 송정동 골목 내부 | 용도 사옥 | 핵심 계단의 입체적 재해석

송정동의 계단은 규칙적이지 않다. 대문을 열자마자 계단이 시작되기도 하고 계단이 대문 위를 지나가기도 한다. 폭과 단 높이는 제각각이다. 이는 좁은 필지에서 여러 세대가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Jihun Bae

 

피노 몬타노는 이 계단 문화를 제거하지 않았다. 대신 확장했다. 계단을 단순한 수직 동선으로 보지 않았다. 오르내리는 과정 자체를 공간 경험으로 만들었다. 계단을 따라 시선이 편집되고 장면이 전환된다. 오르면 새로운 공간이 열리고 다시 오르면 길게 이어진 베란다와 마주한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외부 계단은 인접 대지와의 경계가 된다. 동시에 사옥 내부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장치가 된다. 일조 사선을 피해 점차 물러나는 계단의 배치는 건물을 더 사적인 존재로 만든다. 이 계단은 직원들이 업무 중 자연스럽게 걷는 산책로가 된다. 피노 몬타노는 그렇게 계단을 ‘소나무 숲’처럼 만들었다.

계단은 단순한 수직 동선이 아니라 풍경을 따라 오르는 산책로가 된다. 오르며 열리는 베란다와 마당, 그리고 중랑천과 도시 능선을 향한 시선이 겹치며 ‘소나무 숲 사이에 지은 전망대’라는 송정의 의미를 현재의 공간으로 번역한다. ©Jihun Bae
©Jihun Bae
©Jihun Bae

 

[경계] 방범창의 부드러운 치환: 히알린 베일리Hyaline Bailey

위치 송정동 주거 골목 | 용도 사옥 | 핵심 반투명 안뜰과 루버

송정동의 골목은 담장과 방범창살로 이어진 풍경을 가진다. 개구부 없이 길게 이어지는 벽면은 좁은 도로 폭과 맞물려 답답한 인상을 만든다. 환경을 개선할 여력은 늘 뒤로 밀려왔다.

©Jihun Bae

히알린 베일리는 이러한 조건에서 프라이버시와 개방 사이의 균형을 고민했다. 인접 대지와 가까이 맞닿을 수밖에 없는 배치 조건 속에서 북측 공지를 향해 창을 계획했다. 채광에는 불리했지만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대신 한 방향으로 빛을 모으는 커튼월을 적용했다.

북측 공지에는 ‘투명한 안뜰’을 제안했다. 반투명 루버로 경계를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시선이 통한다. 이는 낮은 담장 안뜰을 바라보던 송정동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루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밤의 골목을 밝힌다. 방범창살이 만들어온 방어적 풍경을 부드럽게 치환했다. 안뜰은 오피스 근무자에게 휴식의 장소가 되고 골목에는 은은한 빛의 풍경을 더한다. 방어를 유지한 채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건축이다.

반투명 루버 벽으로 형성된 안뜰의 경계. 멀리서는 벽처럼 보이고 가까이에서는 시야가 열리며, 골목의 방범창 풍경을 빛을 투과하는 열주로 전환해 프라이버시와 개방감을 동시에 만든다. ©Jihun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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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un Bae

[기억] 동네의 첫인상을 콜라주하다: 멜랑쥬 콜렉션Mélange Collection

위치 송정동 삼거리 | 용도 사옥 및 근린생활시설 | 핵심 문주·박공지붕·베란다의 현대적 콜라주

멜랑쥬 콜렉션은 송정동의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골목 삼거리에 자리했다. 이곳은 송정동의 첫인상이 되는 장소였다. 성수동 개발의 영향을 가장 먼저 체감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새것의 이미지를 앞세우는 방식보다는 송정동만의 감성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가 중요했다.

무창의 수직 코어와 경사지붕 매스는 문주와 박공지붕 등 옛 주택의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서로 다른 시대의 파편들이 겹쳐지며 하나의 건축적 멜랑쥬를 이룬다. ©Jihun Bae

 

이 프로젝트는 송정동의 기형성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대신 그 기원을 추적했다. 과거 송정동의 주택들이 가졌던 박공지붕과 베란다 그리고 담장과 문주를 파편처럼 꺼내 다시 조합했다. 건물은 네 개의 덩어리로 구성됐다. 수직 코어는 문주를 연상시킨다. 1층은 반지하 창의 기억을 담고 2층과 3층은 옛 주택의 스케일을 닮았다. 4층은 박공지붕을 현대적으로 번안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요소를 엮어 하나의 얼굴을 만들었다. 두 가지 이상의 실이 섞여 새로운 결을 만드는 멜랑쥬처럼 이 건물도 과거와 현재를 혼합했다. 송정동의 기억은 장식이 아니라 구조가 됐다.

©Jihun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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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un Bae

한 블록을 점유한다는 것의 책임감

송정 바이브는 과거를 지우지 않았다. 낡음을 숨기지 않았다. 급경사 계단과 좁은 복도와 무창의 담벽을 실패로 보지 않았다. 생존의 기록으로 읽었다. 그리고 그 기록을 현재의 건축 언어로 다시 설계했다.

같은 블록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들은 각자의 필지 안에 고립되지 않으려 했다. 블러드 블록의 투명함이 제방로의 시선을 받아내고 히알린 베일리의 루버가 어두운 주거 골목에 빛을 공급한다. 피노 몬타노의 계단은 좁은 골목의 수직성을 확장하며 멜랑쥬 콜렉션은 동네의 입구에서 이 모든 변화의 서사를 요약한다.

건축이 개발의 도구가 아니라 기억의 매개가 되길 바란다. 옛것을 덮는 대신 겹쳐 놓는 방식이 도시의 매력을 만든다. 송정동은 지금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초입에서 이 건축이 서두르지 않기를 바란다. 거주민과 외지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풍경을 상상했다. 기록으로서의 건축은 그렇게 도시의 시간을 조금 늦추며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

©Jihun Bae

 


프로젝트.
블러드 블록 Blurred Block
피노 몬타노 Pino Montano
히알린 베일리 Hyaline Bailey
멜랑쥬 콜렉션 Mélange Collection

기획 & 설계.
CIID

책임 건축가.
주익현 Ikhyeon Ju

사진.
배지훈 Jihun Bae

송정 바이브, 낡은 골목의 기억을 설계하다 | BRIQUE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