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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여행의 흐릿한 경계, 치앙마이라는 유목 생태계

일과 여행의 흐릿한 경계, 치앙마이라는 유목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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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치앙마이(태국)=김태진 에디터

 

[환상 너머의 치앙마이] 우리는 오랫동안 치앙마이를 저렴한 휴양지나 디지털 노마드의 낙원으로만 기억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현대적인 건축과 공간들은 태국 사회의 복합적인 구조와 깊은 역사를 정직하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은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세 곳의 공간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태국의 현재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여정은 ‘태국창의디자인센터(TCDC) 치앙마이’입니다. 일찍이 형성된 디지털 노마드 생태계를 체험합니다. 두 번째는 ‘마이암MAIIAM 현대미술관’입니다. 리노베이션 건축이 보여주는 매끈한 현대성과 사립 컬렉션이 지닌 특수성, 나아가 이면에 자리한 질문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캄 빌리지Kalm Village’를 통해 태국 디자인의 뿌리를 탐색합니다. 아유타야 왕국 시절부터 지배 계층의 고급스러운 미감으로 자리 잡았던 중국식 건축 양식이 현대의 로컬리티와 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보기 좋은 장소를 나열하기보다 공간의 파사드 뒤에 숨겨진 시스템과 권력, 그리고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이 여정이 독자 여러분에게 태국이라는 나라를 한 층 더 깊게 이해하는 새로운 통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글 싣는 순서.
① TCDC 치앙마이가 증명하는 ‘지식의 공장’과 느슨한 일상의 리듬

 


 

TCDC 치앙마이. 거주민과 여행자들이 어우러져 자유롭게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BRIQUE Magazine

 

두 세계의 경계, 치앙마이

태국 북부의 중심지 치앙마이에 들어서면 국적을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마주한다. 태국관광청은 치앙마이 시내의 실거주자를 13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로 추산한다. 그중 약 20%가 외국인이다. ‘외국인의 도시’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비중이 높다. 치앙마이가 ‘여행자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행자들이 이곳에 도착한 뒤 좀처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인구 구성은 치앙마이만의 문화적 풍경을 만든다. 서구권에서 유입된 디지털 노마드 문화는 이곳의 전통적인 생활 리듬과는 다른 궤도를 그린다. 사찰의 아침 공양과 시장의 분주한 움직임 사이에서 노트북을 펼친 채 일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시내의 카페와 코워킹 스페이스에는 빠른 와이파이를 강조하는 문구가 붙어 있다. 노트북을 펼친 채 몇 시간씩 머무는 여행자를 위한 배려다. 커피 한 잔 가격은 70~100바트 정도로 로컬 식당 한 끼보다 비싸다. 반면 골목 노점에서는 30~50바트면 충분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경제권이 한 도시 안에서 느슨하게 겹쳐진다.

유목민들은 이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간다. 생활은 저렴한 로컬 물가에 기댄다. 일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디지털 생태계 안에서 해결한다. 이동하면서도 일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치앙마이는 그들에게 잠시 머무는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작업 환경이다.

태국 시내에 위치한 왓 프라싱 사원의 아침 공양 모습. 마음을 담아 준비한 공양물을 나누는 태국인들의 모습에는 그들만의 오랜 문화적 리듬이 깃들어 있다. ©BRIQUE Magazine
치앙마이 시내의 한 카페. 로컬의 한 끼 식사비를 웃도는 커피 한 잔의 가격은 이곳의 주된 점유층이 외부에서 온 여행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BRIQUE Magazine

익숙한 공간, 낯선 집중

평일 오후 TCDC 치앙마이를 찾았다. 생각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조용하다는 게 비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회의실에서는 프로젝트 논의가 한창이었고, 누군가는 화면을 바라보며 코드를 짜고 있었다. 아카이브실에서 책과 자료를 넘기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흥미로운 점은 시내 곳곳에서 마주쳤던 한국인 개인 관광객이나 중국인 단체 여행객은 이곳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을 채우는 사람들은 단기간 방문한 여행자라기보다 이 도시의 또 다른 거주자에 가까워 보였다. 관광지에서 흔히 보이는 풍경과 거리가 멀었다.

TCDC는 특별히 화려한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전문 아카이브와 코워킹 공간을 하루 100바트 정도의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접근성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곳에 머문다. 누군가는 일을 하고 누군가는 공부를 한다. 또 누군가는 아카이브 자료를 읽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공간은 그저 열려 있을 뿐이다. 그 안에서 각자의 속도로 하루가 흐른다.

 

TCDC 치앙마이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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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공장이 된 공간

TCDC는 2004년 왕실 칙령에 따라 설립된 총리실 산하 기관이다. 공간의 목표는 국가 차원의 창조경제 진흥이다. 디자인과 창의성을 위한 국가적 학습 자원 센터 역할을 수행한다.

2013년 문을 연 치앙마이 지점은 태국 건축가 ‘두앙릿 분낙(Duangrit Bunnag, DBALP)’이 설계했다. 그는 이곳을 아이디어가 생산되고 교환되는 ‘지식의 공장’으로 정의했다. 건축물 외관이 공장의 형태와 유사한 이유다. 생산의 대상은 물건이 아니라 사고와 창의성이다. 이곳은 산업시설의 구조를 차용한 지적 인프라로 작동한다.

외벽을 감싸는 노란빛 목재 합판은 강렬한 햇살을 차단하는 동시에 건물의 육중함을 상쇄한다. 크게 낸 창을 통해 쏟아지는 빛은 내부 공간을 밝혀 유목민들에게 안정적인 작업 환경을 제공한다.

 

단돈 100바트(한화 약 4000원)로 누리는 전문 아카이브와 코워킹 공간. TCDC의 접근성 높은 이용 요금은 치앙마이의 유목 생태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다. ©BRIQUE Magazine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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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필자는 직업 특성상 온라인 협업과 원격 업무가 익숙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런 방식의 일은 아직 일부 직종에 국한된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출근하지 않는 일상’은 여전히 낯설거나 특별한 사례처럼 보인다.

예전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때 만난 외국인 여행자들이 떠오른다. 간호사나 사회복지사처럼 바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열흘 정도의 휴가를 자연스럽게 보내고 돌아가곤 했다. 그들에게 휴가는 삶을 잠시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일상 속에 포함된 리듬처럼 보였다. 반면 한국에서 휴가는 종종 업무와의 단절처럼 느껴진다. 조직을 떠나는 시간이라기보다 잠시 빠져나오는 시간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치앙마이에서 노트북을 펼친 채 조용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다른 가능성이 떠오른다. 일을 완전히 멈추지 않아도 되고, 여행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 말이다.

회의실 안은 그룹 협업이 한창이다. 개별 업무부터 공동 프로젝트까지, TCDC는 유목민의 다양한 업무 형태를 유연하게 수용한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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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아니라 공기

TCDC의 공간 구성은 한국의 코워킹 스페이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회의실이 있고 아카이브가 있다. 조용히 일할 수 있는 좌석이 있다. 하지만 공간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이곳에서는 누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는지, 얼마나 바쁘게 보이는지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각자 자신의 속도로 일을 하고, 필요하면 다시 노트북을 연다.

치앙마이가 특별한 이유는 어쩌면 이 느슨한 리듬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행자와 거주자, 일과 휴식, 로컬과 외부 문화가 서로 완전히 섞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충돌하지도 않는다. 서로 다른 속도가 같은 도시 안에서 나란히 흐른다.

TCDC는 그 흐름이 잠시 모이는 장소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일과 여행 사이의 경계가 조금 흐릿해진다. 그리고 그 흐릿함이 치앙마이라는 도시의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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