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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깎는 건축가부터 보도블록 닦는 공무원까지

사과 깎는 건축가부터 보도블록 닦는 공무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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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태진 자료. 별도 첨부

 

[보도자료 밖의 책들] 매주 편집팀의 메일함에는 수많은 신간 소식이 쌓입니다. 때로는 저자의 정성 어린 메시지와 함께 증정본이 도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은 이의 마음과는 별개로 에디터로서 깊게 읽고 소개할 만한 책을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지루한 영화도 있느냐는 질문에 “틀린 영화는 없다. 영화마다 옅은 진심이 있을 뿐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에 깊이 동감합니다. 메일함에 당도한 책들 역시 저마다의 옅은 진심을 품고 있을 것이니까요. 다만 좋은 영화나 좋은 책은 가만히 앉아 있는 내 앞에 배달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개봉작과 신간 사이에서 보석 같은 작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영화관으로, 그러니까 서점으로 직접 발길을 옮겨 구석구석 뒤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재는 매끄럽게 정제된 보도자료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광화문 교보문고의 드넓은 서가에서부터 동네 서점의 비좁은 길목까지, 에디터가 직접 발품을 팔아 선택한 ‘현장 기록’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많이 담기보다 오래 남을 책을 골라보겠습니다. 베스트셀러보다 지금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품은 책을 살펴보려고요.

에디터가 선정한 3월의 책. (왼쪽부터) 현장의 언어를 기록한 ‘목수의 연장’ 도시의 부실을 정면으로 응시한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일상의 경이를 포착한 ‘사과의 건축’ ©BRIQUE Magazine

 

① 일상의 반복이 쌓아 올린 경이, ‘사과의 건축’

 

소규모 출판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아이디어 넘치는 작은 책자 앞에서 ‘이런 것도 책이 될 수 있을까’ 싶다가도, 책은 어느새 그 고정관념의 경계를 기분 좋게 허문다. 대형 출판사의 기획 회의실에서라면 한참을 숙고했을 법한 기획도 개인의 명확한 동기만 있다면 곧장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소규모 출판의 장점이다. 그렇게 세상에 나와 한 권의 단단한 물성을 갖게 될 때 지극히 사소하고 사적인 이야기는 비로소 하나의 세계로 완성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예상치 못한 삶의 진실을 마주하곤 한다.

이 책은 건축가 김재기 소장(모요 건축사사무소)이 임유청 편집자를 위해 매일 아침 깎아낸 ‘사과’의 기록이다. 사과의 건축은 임유청 편집자가 사과를 좋아한다는 이유에서 시작된 아침 의식이다. 사과는 건축가의 손길을 거치며 문자 그대로 하나의 ‘사과 건축’으로 완공된다.

사과를 깎는 과정은 실제 건축 공정과 닮아 있다. 한 조각의 크기는 먹기 좋으면서도 설계자가 의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두께로 결정된다. 사과라는 소재를 나누고 접시라는 대지 위에 재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 자체로 건축적이다. 책 속에 나열된 사과 조각들의 배열을 보고 있으면 한 입 거리 과일에서 발견한 조형미에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매일 아침 깎아낸 사과의 기록. 한 입 거리 과일에서 발견한 조형미는 경이로운 ‘건축’이 된다. ©BRIQUE Magazine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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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이들의 기록뿐만 아니라 건축가 정기용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의 정재은 감독이 두 사람을 인터뷰한 내용도 담겨 있다. 정재은 감독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이 책을 보면서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매일매일 반복해야 할 수많은 일들을 떠올려 본다. 대부분은 어떤 가치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그저 그런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책이 그저 그런 일들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 주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저 그런 일상을 적당한 형태로 모아서 보여주는 이 책에 우리를 안심시키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남들도 이렇게 노력하며 살고 있다고.

 

이 책은 시지프스 신화처럼 죽는 날까지 매일 반복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묵묵히 수행해 낸 저자들의 기록 묶음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사과를 깎는 지루한 행위도 시간이 켜켜이 쌓여 궤적을 만들면 그 어떤 거창한 건축물보다 견고한 그들만의 ‘건축’이 된다.

도서명.
사과의 건축

저자.
김재기, 임유청

출판사.
주로 출판사

인터뷰어.
정재은 (영화 ‘말하는 건축가’,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핵심 키워드.
#일상의 건축 #일상기록 #수행하는 마음 #독립출판

 

©BRIQUE Magazine

 

② 현장의 언어는 연장으로부터, ‘목수의 연장’

 

건축가와 목수는 어떤 관계일까. 아마도 긴밀하게 협력하면서도 끊임없이 부딪히는 관계일 것이다. 세계의 충돌은 대개 교집합이 있을 때 일어난다. 분야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은 부딪힐 일이 없지만 건축가와 목수처럼 ‘현장’이라는 같은 좌표 위에서 일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건축가가 추상적인 ‘느낌’으로 말한다면 목수는 구체적인 ‘형태’로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수의 연장’은 그 충돌의 지점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실내건축 목수(실목수)들의 도구에 관한 기록이다. 저자 류제형은 목수의 가장 기본인 연필부터 현대 건축 현장의 필수품인 타카까지, 52가지 연장을 펼쳐놓고 그 속에 담긴 노동의 서사를 풀어낸다.

첫 문장 ‘바람을 만드는 물건이다.’ 저자는 늘 새로운 도구를 소개할 때마다 도구의 기능적 본질을 짚고 시작한다. ©BRIQUE Magazine
©BRIQUE Magazine

 

저자는 스스로를 사주에 ‘편인(偏印)’이 있어 꽤 집요한 구석이 있다고 소개한다. 다행히 그 집요함은 소모적인 인간관계가 아닌 조형이나 마감, 즉 일의 영역으로 향했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대신 차라리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다. 사실 이러한 성정은 오차 없는 마감을 요구받는 실내건축가에게는 축복에 가깝다. 그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찰나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목수마다 제각각인 장비 보관법이나 파지법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 속에 담긴 효율과 안전의 논리를 읽어낸다. ‘디테일’과 ‘속도’라는 양립하기 힘든 가치를 동시에 붙잡으려는 목수의 집요한 고뇌는 그의 문장마다 짙게 서려 있다.

목수는 무겁고 단단한 것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완성’이라는 결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날카롭고 둔중한 도구들은 목수의 언어 그 자체다. 건축가와 목수의 세계는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서로의 연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도서명.
목수의 연장

저자.
류제형

출판사.
시대의창

핵심 키워드.
#실내건축 #인테리어목수 #현장의언어 #노동의숙련도

 

류제형 목수는 네이버 블로그 ‘서목수의 목공 이야기’를 운영중이다. 이 책에는 블로그에 담은 수많은 그의 솔직함이 조금씩 담겨있다. ©BRIQUE Magazine

 

③ 발밑의 부실이 말해주는 것들,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굴착기 소리와 멀쩡해 보이는 보도블록을 갈아엎는 풍경은 우리 사회에서 예산 낭비의 상징이 되었다. 멀쩡한 길을 굳이 교체하거나 작년에 새로 깐 블록이 벌써 깨져 있는 모습을 보며 시민들은 해묵은 의문을 던진다.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해 현장의 공무원이 직접 답을 내놓은 책이다.

저자 박대근은 2007년부터 서울시청 도로관리과와 도로포장연구센터 등을 거치며 서울의 길을 관리해 온 인물이다. 그는 보도블록 행정의 중심에서 연말마다 반복되는 시스템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웃 나라 일본은 비행기 활주로를 보도블록으로 포장할 만큼 반영구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왜 우리는 철저한 기준과 정밀한 시공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이 단순한 문제를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을까. 이 책은 보도블록이라는 작은 단위체를 통해 한국의 행정 체계와 종사자의 직업의식, 나아가 사용자인 시민들의 준법정신까지 가감 없이 비춘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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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 저자는 선진적인 보도블록 시장이 형성된 일본으로 연수를 떠났다. 오사카와 교토, 나고야를 누비며 매일 서너 차례의 미팅과 현장 시찰을 강행했다. 양손에 들기 벅찬 자료를 수집하고 카메라 메모리가 가득 찰 때까지 선진 사례를 기록하며 그는 확신했다. 이 지침들을 서울에 적용하면 우리 길도 틀림없이 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 희망찬 상상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저자가 돌아와 맞닥뜨린 현실과 미완의 개선에 봉착한 서울의 보도 환경이 그 답을 대신하고 있다.

책을 덮으며 깨닫게 되는 서글픈 진실은 법과 규정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규칙과 법령은 이미 충분히 촘촘하다. 하지만 규정이 ‘물길을 막는 재료’라면, 이를 이행하는 사람들의 방치된 마음은 물 그 자체와 같다. 물은 아무리 정교하게 시멘트를 발라 길을 막아도 언젠가 균열을 내고 기어이 제 갈 길을 찾아 흐르기 마련이다.

유튜브 ‘스브스뉴스’에 출현해 보도블럭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박대근 저자 <이미지 출처 = 스브스뉴스 유튜브>

결국 문제는 보도블록 위를 걷고, 깔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달렸다. 기본을 경시하는 마음이 아주 작은 먼지처럼 켜켜이 쌓일 때 아무리 훌륭한 규칙도 유명무실해진다. 보도블록이 깨진 자리는 곧 우리 사회의 책임감이 깨진 자리인 셈이다.

물론 모두가 규칙을 지키기 위해 매 순간 뻣뻣하게 순응하며 살 수는 없다. 때로는 당연하게 굳어진 규칙 앞에서의 합리적인 의심과 유연함을 취하는 태도가 우리 공동체의 미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따금 내 발밑을 지탱하는 이 단단한 블록 하나가 어떤 공정과 마음으로 놓였는지 살피는 감각은 필요하다. 이 책은 보도블록에 관한 기술서를 넘어 우리가 무심히 잃어버린 ‘기본의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도서명.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저자.
박대근

출판사.
픽셀하우스

©BRIQUE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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