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는 공간에서 작동하는 공간으로
글. 김성아 에디터. 정지연
[김성아의 기술 이후의 건축가] 기술은 최적화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만듭니다. AI는 가능성이 높은 선택을 고르고, 인간은 가능성이 없어도 마음이 끌리는 길을 택합니다. 이같은 비합리성은 결함이 아니라 창조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이 감정적 필연 위에서 태어나기에 기술의 시대에도 건축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재는 건축을 둘러싼 기술적 변화의 과정에서 건축가라는 존재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 지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글 싣는 순서.
① 도구를 넘어 사유로 – 건축가의 새로운 손
② 창조자에서 조율자로– 건축가의 초상
③ 보이는 공간에서 작동하는 공간으로 – 가상성 시대의 건축가
파리의 파사쥬Passages를 처음 본 사람들은 대개 그 아름다움을 말한다. 유리 천창 아래로 흘러드는 빛, 철제 보의 반복, 외부의 소음이 한 겹 걸러진 공기의 밀도. 그러나 파사쥬의 진짜 매력은 시각적 조형에 있지 않다. 그곳은 보이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작동하는 공간이었다. 걷는 속도가 달라지고, 시선이 머무르고, 충동적인 소비와 목적 없는 산책이 교차한다.
파사쥬는 도시의 내부에 삽입된 장치였고, 근대적 지각이 실험되는 실험실이었다. 발터 벤야민이 파사쥬에서 읽어낸 것은 새로운 유리 건축의 양식이 아니라, 감각이 조직되는 방식의 변화였다. 파사쥬는 외부와 내부, 상품과 도시, 개인의 사유와 집단의 흐름이 교차하는 반투명한 매개였다. 이 공간은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 사람의 몸과 인식을 작동시켰다. 다만 그 작동을 매개하던 것이 빛과 동선, 물리적 밀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과는 다른 층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작동의 논리는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가상성(Virtuality)의 문제와 정확히 겹쳐진다. 그 차이는 작동의 방식이 물리적 장치에서 데이터와 알고리즘, 피드백 구조로 이동했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건축 역시 더 이상 ‘보이는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공간은 점점 더 행동을 유도하고, 반응을 수집하며, 감정을 조율하는 시스템이 된다.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정보의 외피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건축의 표면은 재료의 질감이나 마모의 흔적을 전달하기보다, 사이니지와 인터페이스로 덮인다. 인공지능은 이 표면을 개인화된 콘텐츠로 가공하고, 공간은 더 이상 사람과 직접 대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상의 이미지와 알고리즘을 통해 우회적으로 말을 건다. 이 말은 현실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상당 부분이 이미 선별되고 조율된 층위를 통해 도달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매트릭스Matrix 안에서 살고 있다.
이 가상성은 시각적 착시가 아니라 작동의 문제다. 실제보다 더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상의 리얼리티가 등장하면서, ‘현실성’의 기준은 뒤집힌다. 물성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대신, 정보와 서사, 반응의 정밀한 조합이 감정을 증폭시킨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에서 보이트-캄프 테스트(Voight-Kampff Test)가 기억에 대한 반응을 통해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분했듯, 오늘날 공간 역시 사용자의 반응을 통해 자신을 갱신한다. 사진은 기억을 저장하는 물리적 매체였고, 데커드의 Photo Enhancer는 숨겨진 단서를 끝없이 확대하며 과거를 호출했다. 이 장치는 은유적으로 말해, 건축가만이 다룰 수 있었던 설계 도구였다. 장소의 표면에 남은 흔적을 해석하고, 파편화된 단서를 하나의 공간적 서사로 엮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장소의 표면에 남은 흔적을 읽어내고, 그것을 다시 서사로 엮는 능력 말이다.

그러나 이제 기억은 더 이상 대지나 재료에만 새겨지지 않는다. AI는 기억을 예측하고, 생성하고, 재조합한다. 도시는 거대한 외부 메모리 시스템으로서 가상 세계로 이식되고, 물리적 실체는 팔림프세스트처럼 겹겹이 중첩된다. 중요한 것은 이 가상화가 형태를 바꾸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설계 조직과 생산 방식 자체를 재편한다. 설계는 더 이상 선형적이지 않다. 이는 창의성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판단이 이루어지는 지점이 하나의 순서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만들고, 도면으로 구현하는 일직선의 흐름은 해체된다. 아이디어는 분석보다 먼저 떠오르고, 중간 결과물은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여러 시나리오가 동시에 전개되고, 설계는 동시다발적인 실험이 된다. 클라우드 기반 협업 환경에서 모델은 결과물이 아니라 공동 작업장이 된다. 도면은 제출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상태다.
건축은 더 이상 벽과 지붕을 만드는 기술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인공지능 기술이 설계 과정의 전면에 개입하면서, 건축은 점차 경험을 조직하고 데이터를 배열하는 행위로 이동하고 있다. 물리적 구조물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은 이제 하나의 결과일 뿐, 건축의 전부는 아니다. 특히 대규모 개발과 복합 프로젝트, 기술 중심의 상업 건축에서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건축은 가상 공간에서 먼저 완결되고, 때로는 그 상태로 소비되며, 현실은 그중 일부만을 받아들이는 단계가 되었다.
과거의 가상 공간은 현실 건축을 위한 예비 실험실에 가까웠다. 시뮬레이션은 검증을 위한 도구였고, 가상성은 언제나 현실의 보조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상 공간은 그 자체로 도시가 되고, 건축이 되며, 삶의 무대가 된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인공지능이 있다. AI는 계산을 빠르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건축이 작동하는 차원을 바꾸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이 변화는 건축가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그는 더 이상 모든 것을 꿰뚫는 전지적 설계자가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한 흐름을 견디며, 복잡한 시뮬레이션과 계산의 결과 속에서 무엇이 현실에 가까운지, 무엇이 감각적으로 울림을 주는지를 판별하는 조율자가 된다. 설계 조직 역시 위계적 구조에서 벗어나, 실시간 협업과 피드백이 가능한 네트워크로 이동한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지금 깨졌고 무엇을 우선 조정해야 하는가다.
건축 생산 역시 가상화된다. 시공은 더 이상 현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로보틱 제작과 프리패브, 3D 프린팅은 설계 단계에서 이미 공정과 품질을 결정한다. 디테일은 장인의 직관이 아니라, 파라미터와 공차의 문제로 번역된다. 품질은 감각이 아니라 로그와 검증 프로토콜로 설명된다. 이때 건축가는 ‘잘 짓는 손’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느낌을 제작 가능한 조건으로 번역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건축 설계 조직은 더 이상 특정 소프트웨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는가로 정의되지 않는다. 오늘날 설계 조직은 점점 디지털 오케스트레이터, 다시 말해 수많은 데이터 흐름과 인공지능 에이전트를 조율하는 운영 주체로 변모하고 있다. 종이 도면과 로컬 파일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설계 사무소의 풍경은 사라지고, 조직의 구조와 생산 방식은 클라우드와 AI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변화는 도구의 교체가 아니라, 설계가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의 전환을 의미한다. 설계 조직은 더 이상 ‘형태를 만드는 집단’이 아니라, 가상 환경에서 건축의 전 생애를 시뮬레이션하고 조정하는 시스템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전환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과거의 기획이 건축가의 직관과 경험에 크게 의존했다면, 오늘날 기획은 데이터와 시뮬레이션의 문제로 이동했다. 법규, 일조, 교통, 주변 시세 같은 조건들은 더 이상 개별적으로 검토되지 않는다. AI 에이전트는 이러한 정보를 즉시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상의 대지를 구성한다. 포르마(Autodesk Forma)와 같은 도구에서 기획은 이미 하나의 가상 프로토타이핑 과정이다. 수만 개의 매스 모델이 생성되고, 각 안은 에너지 효율과 공사비, 환경 성능이라는 수치로 동시에 평가된다. 건축가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떤 조건의 조합이 가장 설득력 있는가를 선택하는 존재로 이동한다.
이러한 가상화는 이해관계자 간의 합의 방식도 바꾸고 있다. 과거 수 개월에 걸쳐 반복되던 협의와 심의는 이제 디지털 트윈 위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설계안은 문서가 아니라 경험으로 공유되고, 의사결정은 설명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루어진다. 기획 단계는 더 이상 준비 과정이 아니라, 이미 실행에 가까운 상태로 압축된다.
설계 프로세스 내부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난다. 설계 조직의 워크플로우는 점점 에이전틱 워크플로우(Agentic Workflow)로 전환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AI를 활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설계 팀의 구성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 건축가 옆에는 구조 최적화 에이전트, 법규 검토 에이전트, 비용 산출 에이전트가 상시적으로 작동한다.
이들은 BIM 모델에 실시간으로 개입하며 오류를 수정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설계는 더 이상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항상 ‘검증된 상태’로 유지된다. 이러한 협업은 물리적 공간의 제약에서도 벗어난다. 엔비디아 옴니버스NVIDIA Omniverse와 같은 실시간 협업 환경에서 설계자들은 파일을 주고받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가상 모델 안에 동시에 접속해 함께 작업한다. 수정과 피드백, 시각화는 분리된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행위가 된다. 설계가 바뀌는 즉시 빛과 재질, 공간의 인상이 갱신되고, 결과는 VR과 AR을 통해 곧바로 체험된다. 랜더링은 더 이상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설계 과정 그 자체에 내장된 감각 장치가 된다.

이러한 변화들을 종합해 보면, 설계 조직의 핵심 자산도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숙련된 인력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면, 이제는 학습된 AI 모델과 축적된 데이터 세트가 조직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워크플로우는 선형적 단계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통합된 시뮬레이션 환경으로 재편되고, 도면은 더 이상 설명서가 아니라 실행 코드로 기능한다.
건축 설계 조직은 ‘건물을 그리는 곳’이라기보다, 건물의 디지털 DNA를 설계하고 그것이 현실에서 정확히 구현되도록 조율하는 소프트웨어 센터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곳에서 건축가는 형태의 창조자라기보다,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의미 있는 선택을 내려야 하는 조율자다. 기술적 조율과 조직적 판단을 거친 이후에야, 이러한 역할은 감각과 경험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설계 조직의 가상화는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이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에 가깝다.
이 모든 흐름은 결국 보이는 공간에서 작동하는 공간으로의 전환을 가리킨다. 공간은 표현이 아니라 운영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 작동은 점점 감정의 영역까지 침투한다. 정밀한 시뮬레이션과 자동화가 무엇을 계산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할수록, 동시에 무엇이 끝내 계산되지 않는지도 드러난다. 가상화의 진전은 감정을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감정이 발생하는 지점을 더 선명하게 노출시킨다. 조명 온도와 음향, 기하학적 구성을 복원한다고 해서 공간의 기억이나 느낌이 완벽히 재현되지는 않는다.
공간에서 경험되는 감정은 색채, 질감, 소리, 냄새, 온도, 습도, 바람, 사람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다. 그 결과는 ‘좋았다’라는 하나의 기호로만 남고, 의미는 눈동자에 일순 포착된 빛이나 채울 수 없는 아쉬움으로 전환된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건축가의 감성이다. 그래서 가상성의 확산은 건축가를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호출한다. 새로운 건축가는 스마트 기술을 통합하는 시스템 통합자를 넘어, 느낌을 코디네이트하는 마술사가 된다. 물리적 공간과 가상 공간, 기억과 데이터, 감각과 예측을 엮어 사용자에게 ‘잃어버린 태초의 기억’을 속삭이는 존재. 그는 공간 스토리텔러이자 경험 디자이너이며, 기억의 조율자다.
파사쥬가 그랬듯, 중요한 것은 투명한 유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유리가 사람의 시선과 몸을 어떻게 움직였는가다. 오늘날의 가상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더 선명한 이미지가 아니라, 더 깊이 작동하는 감각. 건축은 이제 보이는 것을 설계하는 기술이 아니라, 작동하는 세계를 조율하는 사유의 예술이 된다. 그리고 그 경계에 서 있는 존재, 계산을 넘어서 의미를 선택하는 사람. 그가 바로 가상성 시대의 건축가다.
김성아 Sung-Ah Kim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건축 설계와 컴퓨팅을 접목하는 연구를 해오고 있다. 미국(Harvard University)과 스위스(ETH)를 오가며 1990년대에 무르익던 설계 자동화와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를 거쳐 200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영화, 음악, 전쟁사와 지리, 언어 등의 잡학에 관심이 많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 시대의 건축(2021)’, ‘건축학과 교수의 클래식 음악 수첩(2024)’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