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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에서 조율자로

창조자에서 조율자로

Passages건축가기술 이후의 건축가김성아 교수발터 벤야민베르사유살롱문화설계자아케이드우피치 미술관조율자파리파사쥬피렌체Essay
글. 김성아 에디터. 정지연

 

[김성아의 기술 이후의 건축가] 기술은 최적화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만듭니다. AI는 가능성이 높은 선택을 고르고, 인간은 가능성이 없어도 마음이 끌리는 길을 택합니다. 이같은 비합리성은 결함이 아니라 창조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이 감정적 필연 위에서 태어나기에 기술의 시대에도 건축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재는 건축을 둘러싼 기술적 변화의 과정에서 건축가라는 존재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 지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글 싣는 순서.
① 도구를 넘어 사유로 – 건축가의 새로운 손
② 창조자에서 조율자로 – 건축가의 초상


파리 여행에서 파사쥬(Passages)를 처음 마주하는 순간은 언제나 비슷하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리의 소음은 유리 지붕 위에서 한 번 걸러지고, 빛은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은 채 바닥과 쇼윈도 사이를 미끄러지듯 떠돈다. 파사쥬 안에서 사람들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목적지는 잠시 유예되고, 시선은 진열된 물건보다 그 사이를 흐르는 빛과 반사에 머문다. 이곳에서 걷는 행위는 이동이라기보다 체류에 가깝고, 관찰은 소비보다 먼저 일어난다.

파사쥬는 실내이면서 거리이고, 상업 공간이면서 산책의 무대다. 고전적인 도시와 근대적 기술이 어색하지 않게 맞물린 이 좁은 복도에서, 파리는 자신의 몸을 실험했다. 주철 기둥은 반복과 리듬을 만들고, 유리 지붕은 하늘을 완전히 차단하지도, 그대로 들이지도 않는다. 파사쥬의 아름다움은 화려함이 아니라 이 중간 상태에 있다. 완전히 닫히지도, 완전히 열리지도 않은 이 공간은 도시의 속도를 조절하는 일종의 완충 장치처럼 작동한다.

 

파사쥬 ©Sung-Ah Kim
파리 2구에 위치한 Passage Choiseul, Chabe01. <사진 =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발터 벤야민은 바로 이 공간에서 근대적 지각의 구조를 읽어냈다. 그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분석한 파사쥬는 통상적인 건축 유형을 넘어, 감각이 조직되는 방식 자체였다. 벤야민이 말하는 플라뇌르(Flâneur)는 파사쥬를 거니는 산책자가 아니다. 그는 도시를 소유하지 않으며, 목적을 향해 이동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도시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기호, 군중의 리듬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관찰자다. 파사쥬는 상품이 스스로를 신화로 포장하는 무대였고, 유리와 빛, 반사는 욕망을 가시화하는 장치였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소비하는 동시에, 욕망의 형식을 학습했다.

그러나 파사쥬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이론가의 선언이나 건축가의 의도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능적 요구, 상업적 필요, 기술적 가능성이 중첩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이 공간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감각을 재편했다. 벤야민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비의도성이었다. 근대는 스스로를 이성의 시대라 불렀지만, 인간을 재구성한 것은 선언이나 담론이 아니라 공간 속에 은밀히 배치된 장치들이었다. 파사쥬는 근대성의 표상이 아니라, 근대성의 무의식이 드러난 장소였다.

이러한 감각의 실험은 파사쥬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파사쥬 이전에도 이미 실내에서 유사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장소는 궁정이었고, 살롱이었으며, 그 핵심 재료는 유리와 거울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은 프랑스 왕권의 허영을 집약한 공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거울들이 오늘날 글로벌 건축 산업을 구성하는 생 고뱅(Saint-Gobain)의 기술 계보에서 출발했고, 같은 유리 기술이 지금도 루브르의 피라미드와 수많은 현대 건축의 파사드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나의 물질과 기술이 왕권의 상징에서 산업의 표준으로 이동하는 데에는 35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유리가 단지 건축 재료의 역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기억하는 방식, 즉 사유의 조건 자체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는 사실이다.

 

베르사유 내의 유리의 방 Chateau de Versailles – Galerie des Glaces <사진 = Myrabella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생고뱅에서 유리판을 제작하던 모습 (1758년)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사진 = https://archives.saint-gobain.com/ressource/xviiie/1758/1758-un-nouveau-directeur-pierre-delaunay-deslandes-modernise-la-manufacture>

 

바로크 시대의 살롱은 흔히 문학과 철학, 계몽사상의 전초기지로 설명된다. 볼테르(Voltaire)와 디드로(Diderot)의 이름이 오가고, 지적인 대화와 논쟁이 밤늦도록 이어졌다는 서사는 익숙하다. 그러나 살롱을 그렇게 오간 말과 사상의 총합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정적인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그 말들은 어디에서 울렸는가. 어떤 빛 아래에서 오갔으며, 어떤 표면에 부딪혀 되돌아왔는가. 생각은 추상적이지만, 생각이 발생하는 순간은 언제나 감각적이다. 살롱은 방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장치였다. 촛불은 벽을 비추기보다 거울에 반사되었고, 빛은 직진하지 않고 굴절되며 실내를 순환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거울 속의 자신과, 겹쳐진 타인의 얼굴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말은 직선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반사되고, 증폭되고, 지연되며, 미묘하게 변형된다. 살롱의 대화가 선언이나 연설이 아니라 망설임과 여백을 품은 사유의 교환이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벤야민이 19세기 파사쥬에서 읽어낸 지각의 구조는, 이보다 앞선 살롱에서 이미 실험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살롱에서 말과 시선이 반사되고 지연되었다면, 파사쥬에서는 보행과 관찰이 그렇게 작동한다. 목적 없이 걷는 플라뇌르의 시선은, 살롱에서 대화를 오가던 시선의 도시적 확장이다. 결론은 유예되고, 중간 상태가 유지되며, 의미는 직진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다른 의미와 겹쳐진다. 파사쥬는 살롱의 감각을 사적인 내부에서 공적인 도시로 확장한 장치였다. 이 연속성 속에서 건축은 언제나 형태 이전에 감각의 배치를 다루어 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계보를 따라오면, 건축은 점차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과 기억을 조직하는 기술로 드러난다. 건물은 기능한다. 그러나 건축은 기억한다. 기능은 현재에 봉사하지만, 기억은 시간의 층위를 횡단한다. 건축은 언제나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에 놓인다. 기억은 비물질적이지만, 그것이 머무는 그릇은 언제나 물질적이다. 돌과 유리, 철과 목재는 중립적인 재료가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의 압력을 견디며 인간의 감각과 상호작용해 온 매개체다. 마모된 계단의 모서리, 손이 닿아 윤이 난 난간, 빛을 받아 미묘하게 변색된 벽면은 모두 사용의 흔적이자 기억의 표면이다. 건축가는 바로 이 물질 속에 잠재된 기억을 읽어내고,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을 다시 엮어 공간의 서사로 구성하는 존재다. 이때 건축가는 물리적 공간의 설계자가 아니라, 기억을 번역하는 이야기꾼에 가깝다.

 

우피치 미술관 <사진 = 나무위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은 건축이 어떻게 기억의 저장소로 기능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메디치 가문의 행정 공간으로 출발한 이 건물은 시간이 흐르며 르네상스 예술의 집적지가 되었다. 우피치는 예술품을 단순히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 체계적으로 배열되고, 특정한 동선과 시선 속에서 다시 호출되는 구조다. 관람자는 공간을 이동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다. 이는 오늘날의 데이터베이스와도 닮아 있다. 정보는 무작위로 흩어져 있지 않고, 접근 가능한 구조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중요한 것은, 이 기억의 구조가 전적으로 물리적 공간에 의해 조직된다는 점이다. 우피치에서 기억은 클라우드에 저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벽과 바닥, 채광과 이동의 리듬 속에 각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의 방식은 오늘날 점차 다른 형태로 침식되고 있다. 스마트 시티의 알고리즘, 센서와 네트워크로 직조된 환경 속에서 기억은 더 이상 대지에 천천히 새겨지지 않는다. 공간의 사용은 로그 데이터로 축적되고, 경험은 시각화된 통계로 환원된다. 물리적 마모 대신 업데이트가, 축적된 시간 대신 실시간 피드백이 건축의 핵심 언어가 된다. 이 변화는 효율적이지만, 기억의 형식 자체를 바꾼다. 시간은 더 이상 축적되지 않고, 즉각 반응하는 현재로 압축된다.

이 지점에서 오늘날의 건축가는 다시 호출된다. 기술은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방식으로 건축가의 일상을 바꾸고 있다. 도면을 넘기는 손의 감각, 선을 긋는 순간의 판단, 재료의 물성을 읽는 직관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복잡한 연산의 흐름과 대화한다. 설계는 더 이상 선형적인 과정이 아니다. 분석과 아이디어, 구현은 동시에 전개되고, 중간 결과물은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여러 시나리오가 병렬적으로 생성되고, 각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전지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불확실한 흐름을 견디며, 그 안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설계 조직 또한 변화하고 있다. 위계적인 업무 체계 대신, 실시간 협업과 피드백이 가능한 네트워크형 구조가 요구된다. 도면은 더 이상 최종 산출물이 아니라, 계속 수정되고 학습되는 과정의 한 단면이 된다. 디지털 제작 기술은 스케치와 실물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재료의 반응을 다시 설계로 되돌린다. 파라메트릭 설계 도구 역시 특이한 형태를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변화 가능한 조건 속에서 균형을 탐색하는 사고 방식으로 작동한다. 규칙을 설정하고, 예외를 실험하며, 다시 규칙을 수정하는 순환 속에서 인간의 직관과 기계의 계산은 협업한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설계를 결정하지 않도록, 설계자가 기술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건축가는 점점 더 ‘조율자’의 성격을 띠게 된다. 조율자는 과거의 장인처럼 모든 것을 손으로 해결하지도, 근대의 엔지니어처럼 모든 것을 계산으로 환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물질적 기억과 디지털 데이터, 감각적 경험과 알고리즘적 예측 사이의 긴장을 인식하고, 그 균형을 설정하는 사람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사라지게 할 것인가. 무엇을 즉각 반응하게 하고, 무엇을 지연시킬 것인가. 이 선택들은 도면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윤리에 대한 판단이다. 설계는 더 이상 창조의 제스처가 아니라, 해석과 조율, 그리고 책임의 행위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이동한다. 물질적 기억이 약화되고, 가상성이 공간 경험의 중요한 층위로 부상한 지금, 건축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다음 글에서는 이 질문을 가상성의 영역으로 확장해 보고자 한다. 파사쥬와 살롱에서 시작된 감각의 실험은 이제,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성아 Sung-Ah Kim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건축 설계와 컴퓨팅을 접목하는 연구를 해오고 있다. 미국(Harvard University)과 스위스(ETH)를 오가며 1990년대에 무르익던 설계 자동화와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를 거쳐 200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영화, 음악, 전쟁사와 지리, 언어 등의 잡학에 관심이 많다. 주요 저서로는 ‘인공지능 시대의 건축(2021)’, ‘건축학과 교수의 클래식 음악 수첩(202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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