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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앞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AI 앞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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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준석 에디터. 김태진

 

[최소장의 시네마노트] 영화와 건축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각적 매체이며, 인물과 그들을 담아내는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에 좋은 영화에는 인상적인 공간이 함께 등장하곤 합니다. 어떤 장면들은 마치 정교한 건축 사진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영화 속 건축은 ‘말하지 않는 배우’와 같습니다. 배경처럼 머물러 있지만, 장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인물의 감정을 담아냅니다. 영화를 보며 떠오른 상상과 생각들을 짧은 에세이로 연재하려 합니다. 영화를 통해 건축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 싣는 순서.
① 미나리, 그 집의 기억 – 정이삭 감독, 영화 ‘미나리’
② 히라야마 씨의 집을 설계하던 날 – 빔 벤더슨 감독, ‘퍼펙트 데이즈’
③ 루이즈의 언어와 철수 씨의 집짓기 – 드니 빌뇌브 감독, ‘콘택트(Arrival)’
④ 마음이 지은 담장에 관하여 –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존 오브 인터레스트’
⑤ 강변의 무코리타, 그 해 여름의 기억 –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강변의 무코리타’
⑥ 그녀, 불완전함에 관하여 –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녀 Her’
⑦ 당신의 집은 어디입니까 – 박제범 감독 ‘집이야기’
⑧ 그래비티, 진실은 이면에 있다 –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Gravity’
⑨ 계단 중간의 문을 열면 – 실뱅 쇼메 감독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⑩ AI 앞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 클린트 벤틀리 감독의 ‘기차의 꿈 Train Dreams’


 

무료 버전이니 가끔 사용자를 무시하나보다 생각했었다. 그럴듯한 거짓을 사실처럼 늘어놓거나, 프롬프트 내용 모른척하며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답을 내놓는다거나 등등. 그럼에도 확실히 시간 절약되고 오래 고민할 것들 간단히 처리해 주니 이미 편리한 맛에 취해버린 상태다. 새로운 종류의 이물감이야 뭐 어쩔 수 없는 것일 테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결국 유료 버전을 결제했다. 뭐가 다른지, 더 편해질 수 있는 건지 내심 궁금하기도 해서. 달라진 점을 묻는다면 딱히 하나 짚어 말하기는 애매하다. 하지만 뭐랄까, 예전보단 응답의 품질이 한 단계 더 좋아진 느낌이랄까. 가끔은 꽤 성의 있는 결과물을 보여준다.

그 덕분에 작업하던 설계는 잘 마무리했다. 특히 단선으로 대강 그려진 스케치업 이미지 몇 컷 활용해서 풀 랜더링 투시도를 여러 장 생성했는데, 도집 앞면에 첨부해 건축주께 드렸더니 한참 살펴보시며 흡족해하셨다. 예전 같으면 외부 용역 맡기거나 랜더링 감각 좋은 직원 하나가 며칠씩 야근하며 꼬박 붙잡고 있어야 할 일인데 프롬프트 작성부터 결과물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작업은 이제 사람도 필요 없고 끙끙대는 시간도 필요 없겠다. 복잡한 업무 지시, 긴 시간 들이지 않아도 만족할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과정의 생략과 감각의 소거…. 확실히 편하지만 개운치는 않다. 이제 막 시작했고, 앞으로는 정신없이 속도가 붙겠지. 우리가 알던 가치도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이미지 출처 = Black Bear Pictures, Kamala Films>

 

100년 전 대륙 횡단 열차는 과거 인류가 수천 년간 극복 못 한 물리적 거리의 제약을 해결하는 첨단 기술이었다. 기차는 월등한 속도로 먼 거리를 압축하여 투입되는 돈과 시간을 줄였다. 영화 ‘기차의 꿈’에서 주인공 그레이니어는 철로를 만드는 노동자다. 그는 숲을 베어 길을 트고 협곡에 다리를 놓아 기차가 다니는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기차가 달리기 시작할 때 그의 삶이 부서졌다. 기차의 꿈을 위해 일했던 사람이 문명과 단절되는 아이러니, 기술이 진보할수록 개인의 삶이 소외되는 아이러니. 기차의 꿈은 세상의 속도 뒤에 남겨진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이미지 출처 = Black Bear Pictures, Kamala Films>

 

말을 타거나 도보로 몇 주에 걸쳐 대륙을 이동하던 시절 한 번에 수백 명의 승객과 마차 수십 대분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열차는 20세기를 시작하는 징표였다. 하지만 철도를 놓고 문명을 전파하고 확장하는 것이 평범한 개인의 꿈은 아니었다. 인적 없는 산 중턱에 널찍한 땅을 사서 직접 벌목한 나무로 집을 짓고 아내, 어린 딸과 살던 젊은 그레이니어의 꿈은 소박했다. 계절마다 벌목일이나 철로 건설 일거리를 따라 적당히 돈을 벌고,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 그거면 족했다.

돈을 벌러 떠돌며 고된 시간을 보내도 기꺼이 ‘과정’을 견딜 수 있던 건 가족 때문이었다. 그레이니어의 꿈은 기차의 꿈과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가 오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도, 아내도, 딸도 모조리 사라졌다. 그의 인생이 사라져 버렸다. 그레이니어는 잿더미가 된 폐허 위에 아내와 딸과 살던 집과 똑같은 집을 짓는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기다리며 그 자리에 남기로 한다.

 

<이미지 출처 = Black Bear Pictures, Kamala Films>

 

지금도 1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기차의 속도로 변해도 우리의 하루는 걷는 속도로 흐른다. 사실 인생 전체를 뒤흔들만한 큰 사건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삶은 그날이 그날 같은 일과로 채워진다. 5년 후면 사람 수천 명 합친 것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이 벽걸이 TV처럼 우리의 일부분이 된다는데, 그렇다고 삶의 본질이 그리 달라질 게 있을까. 기차의 꿈과 상관없이 살았던 그 시절의 그레이니어처럼 여전히 현재의 우리도 종이에 박힌 글자를 읽고, 작은 텃밭에 채소를 기르고, 펜을 쥐고 직접 도면을 그리고, 돌과 나무를 만지작거리며 각자의 시간을 이어 붙여 나갈 것이다.

 

<이미지 출처 = Black Bear Pictures, Kamala Films>

 

변하지 않는 진실 하나는 중요한 뭔가를 잃은 후에도, 중요한 뭔가가 발견된 후에도 우리의 삶은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개인의 시간은 계속 나아간다. 100년 전 새 문명이 시작되었고 그 시절 수많은 그레이니어들은 아마 자신에게 정해진 시간만큼을, 각자의 슬픔과 고독을, 묵묵히 살아냈을 것이다.

영화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이유는 그때처럼 지금의 우리 역시 ‘과정이 생략되는 시대’ 문턱에 서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AI와 휴머노이드는 인류가 오랜 세월 해오던 탐색과 고민, 시행착오의 가치를 일시에 불필요한 것으로 소각할 것이다. 스스로 찾고, 비교하고, 선택하는 일에서 인간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요청하는 순간, 결과물이 즉시 도착한다. 효율 앞에서 과정은 사라진다.

 

<이미지 출처 = Black Bear Pictures, Kamala Films>

느리게 찾아내고, 실패하고, 그걸 통해 배우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인류의 역사다. 지식이 축적되고 사유가 깊어지는 숙성 과정이 결과물보다 늘 중요한 가치였다. 기차가 공간과 시간을 압도적 속도로 생략해 나갈 때 중요한 가치들이 상실되었다. 그것은 몸에 닿지 않는 감각,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이해, 시간이 깃들지 않은 무심함…. 같은 것들이다. 기차의 꿈이 비행기의 꿈이 되고, 우주인이 달에 가고, 다시 화성으로 인간을 보내는 꿈이 이어지고, 인간보다 수천 배 똑똑한 휴머노이드 시대가 코앞에 다가온 지금이다. 우리는 무엇이 문명이고 발전인지 구분할 수 있는 걸까.

 

세상은 얽히고 설켜 있어. 실마리 하나를 당기면 전체 설계가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 없지. 우린 어린아이에 불과해. 그런데 신이라도 된 줄 알고 대관람차에서 볼트를 뽑아내곤 한다네.

 

그레이니어와 벌목꾼 노인 안이 나누던 대화를 곱씹으며, 오늘 아침도 AI와 씨름 중이다. 여전히 이물감은 있지만 익숙해지려 노력한다. 간단한 프롬프트를 넣으며 결과물이 아니라 너의 의견을 먼저 듣고 싶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소용이 없다. 무턱대고 매끈한 도면과 그럴싸한 랜링 투시도를 여러 장 만들어낸다. 과정을 살피고 맥락에 의미를 두는 건 아마 점점 힘들어질 것 같다.
앞으로의 건축은 무엇이 될까. 즉답 뒤에 남겨진 과정을 소거하지 않는 것. 사람이 머물 자리를 조금 더 허락하는 것…. 그 시절 그레이니어가 그랬듯,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Black Bear Pictures, Kamala Films>

최준석 Junseok Choi
최준석 소장(나우랩건축사사무소)은 서울에서 오랜 시간 건축 실무를 해오다, 용인 보정동에 직접 지은 3층 주택에 터를 잡게 되었다.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건축주의 입장을 깊이 체감했고, 이 경험은 남의 집을 설계할 때 들리는 삶의 사연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출퇴근 없는 삶을 선택하고, 집 1층에 절친 차현호와 함께 작은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건축이란 결국 누군가의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의뢰인과의 편안한 대화에서 좋은 집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집의 귓속말(2020), ‘건축이 건네는 말(2016), ‘서울 건축만담(2014)등을 출간하며 건축과 사람, 도시를 잇는 글쓰기도 지속해왔다.

누군가의 집을 짓고 그 과정을 기록하며 살아가는 백발의 건축가로 남는 것이 그의 오랜 바람이다.

 

*이번 회차를 끝으로 본 연재는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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