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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불완전함에 관하여

그녀, 불완전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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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준석 에디터. 김태진

 

[최소장의 시네마노트] 영화와 건축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각적 매체이며, 인물과 그들을 담아내는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에 좋은 영화에는 인상적인 공간이 함께 등장하곤 합니다. 어떤 장면들은 마치 정교한 건축 사진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영화 속 건축은 ‘말하지 않는 배우’와 같습니다. 배경처럼 머물러 있지만, 장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인물의 감정을 담아냅니다. 영화를 보며 떠오른 상상과 생각들을 짧은 에세이로 연재하려 합니다. 영화를 통해 건축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 싣는 순서.

① 미나리, 그 집의 기억 – 정이삭 감독, 영화 ‘미나리’
② 히라야마 씨의 집을 설계하던 날 – 빔 벤더슨 감독, ‘퍼펙트 데이즈’
③ 루이즈의 언어와 철수 씨의 집짓기 – 드니 빌뇌브 감독, ‘콘택트(Arrival)’
④ 마음이 지은 담장에 관하여 –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존 오브 인터레스트’
⑤ 강변의 무코리타, 그 해 여름의 기억 –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강변의 무코리타’

⑥그녀, 불완전함에 관하여 –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녀 Her’
⑦ 당신의 집은 어디입니까 – 박제범 감독 ‘집이야기’
⑧ 그래비티, 진실은 이면에 있다 –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Gravity’
⑨ 계단 중간의 문을 열면 – 실뱅 쇼메 감독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⑩ AI 앞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 클린트 벤틀리 감독의 ‘기차의 꿈 Train Dreams


일할 때 듣는 노동요로 어릴 때 즐겨듣던 AOR계열 웨스트코스트 팝이나 신스팝, 시티팝 플리를 주로 찾아 듣는다. 캐드CAD 도면 작업의 타건 페이스와 음악 장르의 템포나 리듬감이 잘 맞아서다. 유튜브 검색만으로 1980~90년대 분위기 물씬 풍기는 플레이 리스트가 주르륵 뜨니, 듣고 괜찮아서 모아놓은 재생 목록만 이미 수십 개…. 그중 무엇을 플레이하든 잘 어울린다. 미디엄 템포의 편안한 텐션, 레트로 스타일의 신시사이저 색감, 청량감 있는 기타 리프에 몸을 맡기면 고단한 업무시간은 어느새 과거 어느 날의 여유롭던 한때로 바뀐다.

흥미로운 건 최근 들어 AI가 생성한 플리도 간간이 섞인다는 것. 멜로디, 악기편성, 노래 모두 인공지능의 창작물이다. 처음 들을 땐 오래전 LP나 카세트테이프로 듣던 뮤지션들 – 가령 케니버크나 빌리오션, 클루세이더스, 레이파커주니어 혹은 야마시타 타츠로나 안리같은 – 의 스타일이 느껴져 신기하기도 했다. 그럴듯했고 어쩐지 그 시절 실제로 존재했던 게 아닐까 싶은 음악들이었다. 하지만 뭔가 설명하기 애매모호한 이물감이 있었다. 세련되고 매끈하지만, 귀에 잘 걸리지 않고 훅 빠져나가는 듯한, 마치 향기 없는 플라스틱 꽃 같은 느낌이었달까.

 

©Annapurna Pictures

 

음악은 단순히 코드와 리듬의 조합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좋은 음악은 그 시대의 흔적이 묻어 있고, 특정 세대의 정서와 분위기, 희망과 좌절이 스며 있다. 어릴 적 듣던 옛날 음악을 여전히 즐기는 이유 역시 멜로디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시절 시공간의 기억과 감정이 현재 우리 몸과 마음 어딘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실제 존재했던 지난 시간의 아련함, 그때의 사람들, 거리의 냄새…. 같은 구체적 감각까지 AI가 재현하는 건 쉽지만은 않다.

영화 ‘Her’에서 주인공 테오도르가 느낀 공허함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테오도르와 AI 사만다의 관계는 표면적으론 완벽했다. 사만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전 연인과는 달리 항상 그의 말에 친절히 반응하고, 사려 깊게 위로한다. 심지어 테오도르 스스로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충분히 느끼게 할 만큼. 그러나 둘의 교감은 사실 인공지능 운영체계가 제공하는 시스템 하에서 재현되는 감정일 뿐이었다. 사용자인 테오도르의 불안과 외로움에 맞춰 알고리즘이 정교하게 검색한 AI 플리처럼, 그럴듯하지만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가상의 세계일 뿐이었다.

 

©Annapurna Pictures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대화를 통해 삶의 활기를 얻고 점점 의지하게 되었지만, 사만다는 달랐다. 자체적으로 성장을 거듭하는 사만다의 인공지능은 좀 더 특별한 감정과 사고의 차원으로 끝없이 확장되었는데, 그건 인간은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마침내 사만다가 떠나려 할 때 테오도르는 깨달았다. 사만다의 ‘사랑’은 인간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걸. 사만다는 8,000명이 넘는 사람들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면서 그중 600명 이상과 테오도르처럼 감정적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Annapurna Pictures

 

영화를 보면서 공교롭게 최근 유행하는 건축계 트렌드 하나가 겹쳤다. 특별한 하룻밤을 위한 독채형 스테이 혹은 풀빌라. 누구나 꿈꿔보는 상상 속 주택 이미지에 맞춰 핀터레스트나 아키데일리에서 한 번쯤 본 듯한 이국적 공간을 근사하게 재현한 숙소들. 일과 사람에 지친 이들은 기꺼이 하룻밤 힐링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쓸 준비가 되어있다.

 

이 이미지는 원고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비록 실제 거주하는 집은 아니지만 짧은 이벤트처럼 지내보는 낯선 집에서의 하룻밤은 그것만으로도 활력이다. 더욱이 SNS용으로 더할 나위 없는, 감성 터지는 공간 연출은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고된 일상에 구겨진 자존감을 한껏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레이 & 화이트가 적절히 어우러진 세련된 실내 분위기, 미니멀한 가구와 빈티지한 소품들, 개성 있는 노출 콘크리트 벽, 절제된 간접 조명, 완벽히 보장된 프라이버시, 거실과 연결된 근사한 미니 풀… 등등. 의지대로 잘되지 않는 현실의 삶은 이 순간 잠시 잊어도 좋다.

하지만 생각보다 하루는 길고, 감정은 쉽게 변하고, 저녁과 다르고 아침과 다르고, 우리의 삶은 맥락 없는 하룻밤 낭만과 그리 쉽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음날 아침엔 왠지 모를 아쉬움에 풀에 들어가 짧은 물놀이도 해보고, 비치된 명품 스피커에 평소 잘 듣지도 않는 클래식이나 재즈를 틀어놓고 그윽이 먼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덧 퇴실 시간, 서둘러 짐을 싸다 보면 낯설고 특별했던 이 공간의 설렘은 쉽게 사라지고 만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게 추천해 준 흔한 AI 플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Annapurna Pictures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테오도르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 친구 에이미와 함께 어두워지는 도시의 저녁을 한참 바라본다. 둘의 뒷모습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늘 불완전하고 힘겨운 모순투성일지라도, 우리의 삶은 결국 가상이 아닌 현실 세계 속에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자”라고.

 

유튜브 AI 플리가 우리에게 건네는 공허함과 사만다와 테오도르가 끝내 교감하지 못한 정서적 공백은 닮았다. 마찬가지로 하룻밤 황홀한 기분을 제공하는 스테이의 무드 조명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리얼리티는, 앞으로의 건축에서도 점점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싶다.

어깨를 기대고 아련한 풍경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와 에이미의 뒷모습엔 인공지능의 공허함도 쓸쓸한 이물감도 없었다. 다만 현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단함이 있었고 묘한 위안을 주는 저녁 거리의 침묵이 있었다. 테오도르의 그녀 사만다가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듯, 그럼에도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삶의 ‘불완전함’이다. 완전치 못한 너와 나, 그 빈틈에 채워지는 이야기가 결국 삶이 되고 훗날 되돌아보며 회상하는 근사한 과거가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함께 할 우리의 미래는, 어쩌면 그 틈을 얼마나 잘 마련해 두느냐에 달려 있는지 모르겠다.

 

©Annapurna Pictures

 

최준석 Junseok Choi
최준석 소장(나우랩건축사사무소)은 서울에서 오랜 시간 건축 실무를 해오다, 용인 보정동에 직접 지은 3층 주택에 터를 잡게 되었다.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건축주의 입장을 깊이 체감했고, 이 경험은 남의 집을 설계할 때 들리는 삶의 사연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출퇴근 없는 삶을 선택하고, 집 1층에 절친 차현호와 함께 작은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건축이란 결국 누군가의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의뢰인과의 편안한 대화에서 좋은 집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집의 귓속말(2020), ‘건축이 건네는 말(2016), ‘서울 건축만담(2014)등을 출간하며 건축과 사람, 도시를 잇는 글쓰기도 지속해왔다.

누군가의 집을 짓고 그 과정을 기록하며 살아가는 백발의 건축가로 남는 것이 그의 오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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