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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계단 중간의 문을 열면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계단 중간의 문을 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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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준석 에디터. 김태진

 

[최소장의 시네마노트] 영화와 건축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각적 매체이며, 인물과 그들을 담아내는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에 좋은 영화에는 인상적인 공간이 함께 등장하곤 합니다. 어떤 장면들은 마치 정교한 건축 사진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영화 속 건축은 ‘말하지 않는 배우’와 같습니다. 배경처럼 머물러 있지만, 장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인물의 감정을 담아냅니다. 영화를 보며 떠오른 상상과 생각들을 짧은 에세이로 연재하려 합니다. 영화를 통해 건축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 싣는 순서.
① 미나리, 그 집의 기억 – 정이삭 감독, 영화 ‘미나리’

② 히라야마 씨의 집을 설계하던 날 – 빔 벤더슨 감독, ‘퍼펙트 데이즈’
③ 루이즈의 언어와 철수 씨의 집짓기 – 드니 빌뇌브 감독, ‘콘택트(Arrival)’
④ 마음이 지은 담장에 관하여 –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존 오브 인터레스트’
⑤ 강변의 무코리타, 그 해 여름의 기억 –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강변의 무코리타’
⑥ 그녀, 불완전함에 관하여 –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녀 Her’
⑦ 당신의 집은 어디입니까 – 박제범 감독 ‘집이야기’
⑧ 그래비티, 진실은 이면에 있다 –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Gravity’
⑨ 계단 중간의 문을 열면 – 실뱅 쇼메 감독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⑩ AI 앞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 클린트 벤틀리 감독의 ‘기차의 꿈 Train Dreams


 

카페 ‘데비DEBBY’©Junseok Choi

 

몇 해 전,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의 기억이다. 아침 산책길에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선 동네 주변을 걷다가, 나는 처음 보는 작은 카페 하나를 발견하고 잠시 몸을 녹일 겸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의 이름은 ‘데비DEBBY’. 대략 예닐곱 평쯤 될까. 2인용 테이블 세 개와 말수 적은 젊은 바리스타가 일하는 옹색한 코너키친이 전부인 공간에, 빌 에반스Bill Evans의 피아노와 스콧 라파로Scott LaFaro의 베이스가 느린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눈을 털며 들어오던 동네 아저씨에게, 네이비 컬러의 폴로 맨투맨 티셔츠를 입은 젊은 바리스타가 다소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기계가 예열 중인데, 10분만 기다려주시면 그때 주문 받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아침 산책길은 더 즐거워졌다. 그의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데비의 시그니처인 넛츠 에스프레소와 피칸 쿠키는 일품이었다. 빈티지 야마하 앰프와 JBL 4312를 거쳐 흘러나오는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듀크 조던Duke Jordan, 스탄 게츠Stan Getz의 익숙한 연주들도 좋았다. 분주한 겨울 아침 풍경을 창밖으로 바라보던 그 시간이 행복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갔다.

 

©Pathé Frères

실뱅 쇼메Sylvain Chomet 감독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기억 속 공간, 장소에 관한 이야기다.

폴의 일상은 매일 똑같다.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이를 닦고 이모들의 지겨운 콧노래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의 유일한 행복은 이모들의 댄스 교습소에서 반주를 치며 가끔 슈게트를 먹는 것. 거의 온종일 건설 장비 같은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치다가 하루에 한 번 몽유병 환자처럼 단골 빵집으로 걸어가 슈게트를 사 먹는다.

그러던 어느 날, 피아노와 슈게트 사이를 지루하게 오가던 폴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우연히 아파트 계단 중간의 문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간 폴. 온갖 식물과 밝은 볕이 가득한 정원에는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비밀정원은 일상에 갇혀 있던 폴을 엄마와 아빠와 함께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이끈다.

©Pathé Frères

 

다시 돌아와, 겨울이 끝나고 착공을 기다리던 현장들이 시작되면서 한가롭던 아침 산책은 중단되었다. 벚꽃이 날리고 장마가 오고, 무더위가 지나갔다. 현장이 하나둘 끝나 가던 초가을 무렵, 오랜만에 가 본 그곳에는 아몬드 풍미 근사했던 넛츠 에스프레소도, 피칸 쿠키도, 잘 웃지 않던 젊은 바리스타도, 빌 에반스와 마일스 데이비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아이스크림을 파는 무인 할인 점포가 들어왔다. 비밀정원이 사라진 후 망연자실해진 폴의 심정과 비슷해진 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문을 열고 들어가 카페오레 하나를 사서 베어 물었다.

©Pathé Frères

 

우리 모두는 오래전 어떤 공간과 장소, 거기에 있던 사람들,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은 진실일까? 시간이 흐르며 아마도 다른 시간들이 그 기억 위에 포개지고 겹쳐졌을 것이다. 확실하다고 믿었던 진실도 처음과는 다른 형태가 되었을지 모른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각색된 허구인지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시간은 지금도 현재 내 눈앞의 순간을 과거로 밀어내고 미래를 재촉하기 바쁘다. 기억 속의 과거란 편한 대로 편집되고 왜곡된 것. 실제 했던 상황의 세부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치 않는 하나가 있다. 우리의 기억이란 대부분 어떤 공간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 사람과 이야기는 잊혀지더라도 공간의 형상과 감각만은 잘 잊히지 않는다.

©Pathé Frères

 

반복된 일상을 살던 폴이 우연히 계단실 중간 문을 열고 들어가 발견한 비밀정원처럼 내게도 온전히 혼자 즐기는 비밀 공간이 여럿 있었다. 행불행은 마음의 문제라지만 일상의 현실적 행복은 대개 소소한 발견과 작은 즐거움에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폴의 비밀정원을 알기 훨씬 전부터 그런 공간을 찾으러 두리번거리고, 발견하고, 사랑하며 살아온 것 같다.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젊은 시절에는 집과 직장을 오가던 길에 있던 지하철역 근처 지하 헌책방이 그랬고, 또 한때는 기막힌 맛의 바삭한 크루아상을 팔던 모퉁이 빵집이 그랬고, 한참 와인에 빠져 있을 땐 구하기 어려운 희귀템을 싼값에 구해 주던 주류 가게 사장님과의 수다가 즐거워 그곳을 자주 들렀다.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잔잔한 위안을 주는 공간을 떠올려 보면 누구든 폴의 비밀정원처럼, 아마도 다들 오랜 기억 구석 어딘가엔 보물상자 같은 공간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Pathé Frères

요즘 내가 공을 들이고 있는 공간은 동네 목욕탕이다. 얼마 전 옆 동네를 산책하다 발견한 이곳은 다 해 봤자 100평이 안 될 것 같은, 게다가 추억의 열쇠 락커가 있는 레트로 목욕탕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새벽 오픈 시간에 맞춰 목욕탕에 가면 아무도 없는 온탕을 나 홀로 전세 낼 수 있는데, 그때마다 아주 어릴 적 잠실 아파트 살던 때의 기억 하나가 소환된다.

일요일 새벽이면 아버지는 나를 깨워 상가 3층 목욕탕에 갔다. 새벽 시간의 목욕탕은 한산했다. 늘 보는 할아버지들 몇 분 외에는 없었고, 날씨 궂은 날이면 우리 둘뿐인 적도 많았다.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열탕에 홀로 들어가 “아, 시원하네. 좋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탕에 몸을 담갔다가 화들짝 놀랐던 기억들, 얼음처럼 차갑던 냉탕의 한기와 한증막의 무지막지한 열기가 어린 내게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수증기 피어오르던 실내는 따뜻했고 높은 측창에는 햇살이 늘 가득했다.

오늘도 입을 꾹 다물고 슈게트(그게 아니면 술, 모임, 쇼핑…) 따위 한 입 베어 물며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계단 중간의 문을 열고 비밀정원을 찾아낸 폴처럼 온전한 나의 공간을 그리워한다.

영화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남긴 유명한 구절로 시작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경우는 진정제가, 어떤 경우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中

공간을 발견하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주변을 잘 살펴보면 계단 중간의 문이 보일 것이다. 바쁘게 오르내리느라 그 문을 보지 못할 뿐.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포스터 ©찬란

최준석 Junseok Choi
최준석 소장(나우랩건축사사무소)은 서울에서 오랜 시간 건축 실무를 해오다, 용인 보정동에 직접 지은 3층 주택에 터를 잡게 되었다.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건축주의 입장을 깊이 체감했고, 이 경험은 남의 집을 설계할 때 들리는 삶의 사연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출퇴근 없는 삶을 선택하고, 집 1층에 절친 차현호와 함께 작은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건축이란 결국 누군가의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의뢰인과의 편안한 대화에서 좋은 집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집의 귓속말(2020), ‘건축이 건네는 말(2016), ‘서울 건축만담(2014)등을 출간하며 건축과 사람, 도시를 잇는 글쓰기도 지속해왔다.

누군가의 집을 짓고 그 과정을 기록하며 살아가는 백발의 건축가로 남는 것이 그의 오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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