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한국 건축이 답할 때
에디터. 정지연 자료. 사단법인 서울건축포럼(SAF),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한국 건축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정책 제언을 위한 건축계 토론의 장이 지난 5월 12일 서울 서초동 대한건축사협회 대강당에서 열렸다.
사단법인 서울건축포럼(SAF)이 주최하고 서울시건축사회가 후원한 이 행사는 한국 건축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과 정책 제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자리에는 건축과 도시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업 건축사, 관련 학과 교수와 학생, 유관 기업 및 기관 관계자 등 150여 명이 참석해 3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패널 토론과 방청객 오픈 토론에서 나왔던 주요 이슈와 쟁점들을 주제별로 나눠 정리해본다.

왜 해외 건축가인가
이날 토론에서는 주최 측과 패널들이 미리 준비한 질문이 토론 진행 내내 자막 형태로 영상 화면을 차지했다.
제기된 질문은 △한국 건축의 현실 △왜 해외 건축가인가 △한국 건축사의 잘못인가 △외부 요인인가 △국제적 흐름에 반응할 한국 건축의 방향성 △한국 건축의 미래 가치 창출을 위한 정책 등이었다.
토론의 발제와 진행을 맡은 전이서 전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최근 서울 강남의 모 빌딩이 유명 해외 건축가의 설계로 시작됐지만, 완공된 건물은 당초 계획과는 전혀 다르고 시공 품질도 조악한 결과물로 마무리된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다소 표피적인 질문일 수 있지만 해외 건축가를 초빙해 설계를 맡길 경우, 이와 같은 유사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데도 민간과 공공은 왜 해외 건축가에게 목을 맬까요”라고 토론의 포문을 열었다.

첫 토론자로 나선 윤승현 중앙대 건축학과 교수는 “아모레퍼시픽이 데이비드 치퍼필드에 설계를 맡겨 완성한 용산 사옥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물이 됐다”면서 “민간 기업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이같이 하는 것은 여기서 논의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논의를 ‘공공 건축’에 집중해 우리나라 공공 건축물의 생산 과정과 시스템, 시공 품질 등의 문제점을 짚어내고, 특히 정치인들이 단기간의 인기와 성과만을 생각해 공공 건축의 발주를 무분별하게 해외 건축가에게 맡기는 데에는 대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긴 호흡을 갖고 바라봐야 하는 도시와 건축이 정치적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건축잡지 ‘미로’의 박정현 편집장은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빠르게 건축물을 늘려왔지만 좋은 공공 건축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면서 “지자체나 기업들이 미술품을 수집하듯 해외 건축가를 불러 경쟁에 이기려고 하는 현상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고 내다봤다.
김선아 스페이싱 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일제강점기와 전쟁 후 빠르게 복구하기 위해 국가 도시 건설과 건축이 이뤄지던 시기를 지나 민선 지자체가 들어서면서 도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고 있다”면서 “도시와 건축을 전문가의 개입 없이 행정에서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시스템과 제도를 개선해야한다”고 말했다.
김상길 에이텍 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는 “해외 건축가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활용해 좋은 건축물을 남길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우리가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선영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는 “IMF 이전에도 해외 건축가와의 협업 프로젝트가 상당히 많았는데, 당시 참여했던 10개의 국내 회사 사례와 계약 조건 등을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면서 “국내 건축사들은 해외 건축가들 뒷바라지만 하고 이름을 드러낼 수도 없고, 경험의 축적이나 학습 효과에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금만 줄줄 새는 것이 아니라, 해외 건축가들과의 협업이 우리의 도시를 아름답게 하거나, 좋은 경험으로 남을 수 있도록 보강해야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건축과 건축사의 위상
토론은 우리나라 건축의 위상과 건축사를 대하는 공공의 자세로 이어졌다.
조남호 솔토지빈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우리나라 근대건축사를 연구하는 황두진 건축사에 따르면 일본은 일찍 개항을 하면서 근대건축을 높은 수준에서 시작하고 우대했지만, 우리는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전후인 1954년에도 전문학교 수준에서 다뤄졌다”면서 “같은 맥락에서 공공에서는 건축사를 절차나 규제로 관리하고 통제해야하는 대상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조 대표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건축가 존 홍 서울대 교수와 다니엘 바예가 겪은 일화를 전하며 해외와 달리 한국의 공공기관은 건축사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아 시간과 비용이 늘어나는 비효율성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김용미 금성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지난 3월 ‘서울총괄건축가 파트너스 포럼’에 해외에서는 건축가들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서는 건축학과 교수가 참석했다는 점도 공공이 건축사를 대하는 관점을 빗대어 볼 수 있다고 꼬집었다. 공공 건축물 시상식이나 언론 보도에서도 건축사 이름은 불러지지 않는다는 점도 언급했다.
발제 겸 진행을 맡은 전이서 전아키텍츠 대표는 “음악과 영화에는 크레딧이 분명히 있고 크리에이터를 보고 작품을 고르는 문화가 자리잡았는데 건축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길 에이텍건축 대표는 자성의 목소리도 냈다. 그는 ‘중간 건축’이라는 표현으로 소형 주거나 저가 주택 등 일상적인 건축도 품질을 올릴 수 있도록 더 노력을 기울였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제도와 시스템의 개선
건축과 건축사에 대한 사회적 위상 제고보다 더 시급한 것은 좋은 건축을 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다.
이선영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건축의 질이 답보상태인 것은 일관성이 없어서”라며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기획자, 설계자, 실시설계, 시공, 감리 등이 모두 따로 움직이면서 당초 기획 및 설계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제대로 된 조사나 기획 없이 현상 공모를 통해 빨리빨리 처리하면서 건축물의 지속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는 현실도 꼬집었다. 거기에 탑다운top-down 방식의 업무처리 때문에 현장 상황이 잘 반영되지 않아 조악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낮은 설계비와 처우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전이서 전아키텍츠 대표는 “설계자가 해야하는 업무 범위에 비해 불합리할 정도로 대가가 낮다”고 지적했다.
이에 김용미 금성건축 대표는 “건축사협회 이사로 지난 2년간 활동하면서 설계비 제대로 받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면서 “미흡하지만 ‘민간 건축 대가 기준도 공공의 기준에 준한다’는 한 문장을 바꿔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설계도서 납품을 협회가 주관해 설계비를 대신 받아주는 방법도 아이디어로 냈다. 김 대표는 협회의 공정 공공 공모 위원장을 맡아 △심사위원 사전접촉금지 △설계공모운영지침 개정안 △설계공모 표준 지침서 등을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움직이면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을 만들었던 그때처럼 공공도 바꿀 수 있다”고 “다시 힘을 모아야한다”고 제안했다.
공공건축가 제도의 문제점도 거론됐다. 제도가 도입된지 13년이 됐지만 당초 의도가 희석되고, 행정의 방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김선아 대표는 “공공건축가와 총괄건축가 제도는 우수한 정책이었으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면이 있다”면서 “장기적인 시각으로 책임감을 갖고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보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의 성과 계승, 공공 건축에서의 감리 권한 확보, 건축설계의 저작권 인정 등 해묵은 과제도 다시 거론됐다.
국제적 흐름에 반응할 한국 건축의 방향성
우리나라 건축계의 위상을 낮추는데 사용되는 ‘프리츠커 상’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박정현 ‘미로’ 편집장은 “한국 건축계는 서구 건축에 대한 인정 투쟁을 멈춰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리츠커 상은 역사도 짧고 전 인류적 큰 가치를 달성하고 있지 않다”면서 “더이상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부르며 가치를 왜곡하지 말아야한다”고 덧붙였다. 박 편집장은 “한국 건축계가 사대주의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윤승현 교수는 “대한민국 사회는 이미 대단히 정교하고 고도화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줄 안다”면서 “민간이든 공공이든 좋은 결과에 대한 갈증이 크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학교 건축 과정에서 틀을 깨기 위해 기존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고 시범사업을 실시했던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나라 공공 건축 시스템은 완전히 바뀌어야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공공 건축이 빠른 공급만에만 매몰되지 말고, 국민이 어떤 삶을 누릴 지를 도시적 고민을 더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김선아 대표는 “도시는 장기적으로 만들어야하고 축적이 돼야하는데 우리는 생존과 성장에 급급했기 때문에 축적이 부족하다”면서 “앞으로는 쌓이는 일을 해야하고, 그럴려면 전문가가 외부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시스템과 주체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해외 건축가와의 모범적인 협업 결과물도 소개됐다. 조남호 솔토지빈건축 대표는 “서울시립사진미술관과 로봇박물관의 경우, 예산이 부족해 해외 건축가는 외관에 집중하고 이후 운영자가 추가 예산을 확보해 마무리했다”면서 “이처럼 통상적인 절차를 넘어서 좋은 결과물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국내 건축사에게도 부여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건축의 미래 가치 창출
건축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삶과 직결되고 문화적 인프라이며 환경 문제까지 고려한다면 건축은 우리의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은 도시계획가나 건축사, 공공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날 포럼은 방청객이 함께 하는 오픈 토론 순서도 마련돼 있었다.
다수의 참석자들은 건축 산업 전반에 대한 시스템 정비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최소한 건축사가 설계한 안이 제대로 시공될 수 있도록 관리감독권 부여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있었다. 또한 공공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문화적 역량 강화와 전문성 확보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복잡한 절차와 불합리한 규제의 철폐, 표준 설계 도입, 자재 및 재료 기술력 확보 등 다양한 의견이 표출됐다. 건축사들의 경영 교육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한 참석자는 “부동산 정책에 밀리고, 최저가 입찰에 밀려서는 우리 건축이 선진화되기 어렵다”면서 “제도 개선과 법규 보완 등도 필요하지만 서로 격려하고 좋은 사례를 확산해 나가는 문화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대성 우연히 프로젝트 대표는 “헌법 제35조 3항의 ‘국가가 주택개발 정책 등을 통해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은 1987년 개정된 후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면서 “헌법에 건축이 아닌 주택으로 표기되면서 이후 개발정책은 부동산 대책으로만 갈음하고 있어 높은 수준의 국민적 삶을 건축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헌법의 주택이 이제는 건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성용 서울건축포럼 의장은 “오늘 나온 얘기들을 바탕으로 정책 제언과 제도 개선이 이뤄질 수 있도록 후속 작업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